전체 글 1931

우리 동네 구자명 씨 - 고정희

우리 동네 구자명 씨    고정희(高靜熙, 1948~1991)      맞벌이 부부 우리 동네 구자명 씨   일곱 달 된 아기 엄마 구자명 씨는   출근 버스에 오르기가 무섭게   아침 햇살 속에서 졸기 시작한다.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경적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옆으로 앞으로 꾸벅꾸벅 존다.   차창 밖으론 사계절이 흐르고   진달래 피고 밤꽃 흐드러져도 꼭   부처님처럼 졸고 있는 구자명 씨,   그래 저 십 분은   간밤 아기에게 젖 물린 시간이고   또 저 십 분은   간밤 시어머니 약시중 든 시간이고   그래그래 저 십 분은   새벽녘 만취해서 돌아온 남편을 위하여 버린 시간일 거야.   고단한 하루의 시작과 끝에서   잠 속에 흔들리는 팬지꽃 아픔   식탁에 놓인 안개꽃 멍에..

내가 읽은 시 2024.05.14

나무도 바윗돌도 없는 산에 - 작자 미상

나무도 바윗돌도 없는 산에   작자 미상(조선 후기)       나무도 바윗돌도 없는 산에 매에게 쫓긴 까투리 마음과   큰 바다 한가운데 일천 석 실은 배에 노도 잃고 닻도 잃고 돛줄 끊어지고 돛대 꺾어지고 키도 빠지고 바람 불어 물결 치고 안개 뒤섞여 자욱한 날에 갈 길은 천리만리 남았는데 사면이 검어 어둑 저뭇한데 천지적막하고 큰 파도 떴는데 해적을 만난 도사공의 마음과   엊그제 임 여읜 내 마음이야 어디에다가 견주리오

내가 읽은 시 2024.05.13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 정호승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정호승     나는 왜 아침 출근길에   구두에 질펀하게 오줌을 싸놓은   강아지도 한 마리 용서하지 못하는가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구두를 신는 순간   새로 갈아 신은 양말에 축축하게   강아지의 오줌이 스며들 때   나는 왜 강아지를 향해   이 개새끼라고 소리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   개나 사람이나 풀잎이나   생명의 무게는 다 똑같은 것이라고   산에 개를 데려왔다고 시비를 거는 사내와   멱살잡이까지 했던 내가   왜 강아지를 향해 구두를 내던지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는데   나는 한 마리 강아지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진실로 사랑하기를 원..

내가 읽은 시 2024.05.13

혼밥 - 이덕규

혼밥   이덕규(1961~ )     낯선 사람들끼리   벽을 보고 앉아 밥을 먹는 집   부담없이   혼자서 끼니를 때우는   목로 밥집이 있다    혼자 먹는 밥이   서럽고 외로운 사람들이   막막한 벽과   겸상하러 찾아드는 곳    밥을 기다리며   누군가 곡진하게 써내려갔을   메모 하나를 읽는다    “나와 함께   나란히 앉아 밥을 먹었다”    그렇구나, 혼자 먹는 밥은   쓸쓸하고 허기진 내 영혼과   함께 먹는 혼밥이었구나    한번 다녀들 가시라       —『오직 사람 아닌 것』2023.3

내가 읽은 시 2024.05.07

먼 훗날 - 둘다섯

먼 훗날   정진성 작사 작곡   둘다섯 노래   (소프라노 권혁연 cover)   가랑잎 한 잎 두 잎 들창가에 지던 날   그 사람 나에게 작별을 고했었네   먼 훗날 또다시 만날 거라고   그렇게 말할 때 손을 잡았네   가랑잎 한 잎 두 잎 들창가에 지던 날   함박눈 소리 없이 내리던 밤에   그 사람 나에게 작별을 고했었네   세월이 가며는 잊을 거라고   그렇게 말할 때 함께 울었네   함박눈 소리 없이 내리던 밤에   가랑잎 한 잎 두 잎 들창가에 지던 날

트럼펫 악보 2024.05.03

어머니를 위한 자장가 - 정호승

어머니를 위한 자장가   정호승 (1950~)     잘 자라 우리 엄마   할미꽃처럼   당신이 잠재우던 아들 품에 안겨   장독 위에 내리던   함박눈처럼    잘 자라 우리 엄마   산 그림자처럼   산 그림자 속에 잠든   산새들처럼   이 아들이 엄마 뒤를 따라갈 때까지    잘 자라 우리 엄마   아기처럼   엄마 품에 안겨 자던 예쁜 아기의   저절로 벗겨진   꽃신발처럼

내가 읽은 시 2024.05.01

팽목항에서 - 임선기

팽목항에서   임선기(1968~)     엄마가 새끼에게   밥을 먹이고 있다    부두도 눈이 부어 있다    맹골수도 바람은 세고   바다는 하염없이 끌려간다    바람도 바다도 제 존재를 괴로워한다    사람들은 영혼을 말하고   오래된 눈물을 흘리고 있다    나부끼는 리본들은   하늘에 있는 것 같다    말은 살아남은 자처럼   말이 없다    모든 비유가 열리고 닫힌다    초록이 너무 푸르다

내가 읽은 시 2024.04.30

새로운 카메라와 헌 책상

어제는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울산에 다녀왔다. 김교수의 아파트에 들러서 먼저 콤펙트 디지털 카메라 두 대를 전달받았다. 카메라는 Canon의 G7X-markⅢ와 Panasonic의 LUMIX zs200d이다. 사진 마니아인 김교수로부터 카메라에 대한 설명을 잠시 들은 후 창밖 풍경을 줌인하여 시험 촬영을 해보았다. 두 대 모두 선명하게 사진이 잘 찍혔지만, 아직은 복잡한 촬영 모드를 제대로 활용할 줄 모른다. 앞으로 사용해 보면서 어느 것이 나의 취향과 용도에 더 맞는지 검토해 볼 생각이다. 그가 비교하며 설명해준 두 디카의 스펙을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G7X-markⅢ : 1인치 센서(CMOS), 20.1메가픽셀, 24~100mm렌즈(9군11매), f1.8~2.8 조리개, 틸트형 모니터, 30..

텃밭 일기 2024.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