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일기

팔공산 종주(4) - 가산바위에서 파계재까지

공산(空山) 2024. 2. 25. 05:51

어제는 내가 1년에 한두 번씩 3년에 걸쳐 구간별로 실행해 오던 팔공산 주능선 종주를 마무리하였다. 지지난해 1월의 파계재―동봉, 그해 가을의 동봉―관봉(갓바위), 올해 1월의 능성재(환성산)―초례봉 종주에 이어 남은 구간인 가산바위―파계재를 종주한 것이다. '가팔환초'라고 불리는 팔공산 주능선 종주 코스에서 첫 순서가 되곤 하는 가산이 어쩌다 보니 내겐 맨 나중 순서가 되어 '팔환초가'가 되었다.

내가 한 달 남짓만에 다시 팔공산 종주에 나선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며칠 전에 시내엔 비가 내렸지만, 높은 산엔 그 비가 눈으로 내렸었다. 그래서 팔공산 주능선이 하얗게 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모습이 멀리서 바라보였던 데다 봄이 온 것같이 푸근하던 기온이 갑자기 떨어져서 상고대가 많이 피어 절경일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눈 한번 제대로 오지 않은 이 겨울이 가기 전에 설경을 만끽하고 싶었던 것이다.

팔공산맥의 서쪽 끝자락인 칠곡군 학명동 쪽에서 입산하여 가산바위, 한티재, 파계재를 거쳐 파계사 쪽으로 하산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내가 사는 봉무동에서 학명동까지 가는 데는 대중교통편이 복잡하였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6시 20분에 집을 나서서 인터넷에서 길 찾기를 하며 도로를 건너고, 버스 정거장을 찾고, 버스를 기다리며 '동구8', '동구9', '칠곡1', '300'번 등 네 번이나 버스를 갈아타야 했지만 짜증 같은 건 나지 않았다. 비록 시간은 많이 걸리지만 이렇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하루 일정의 뜻깊은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아니던가. 더구나 입산 지점과 하산 지점 사이의 거리가 먼 능선을 탈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더 편리할 테니까. 
 
09:20, 5,500 계정사 도착

국도 5호선 도로변의 학명동에서 300번 버스를 내리고, 길을 잘못 든 바람에 낯선 마을의 골목길을 한 바퀴 돌며 둘러보게 되었다. '계정사' 앞에 도착했을 땐 벌써 9시 20분이었고, 만보계 앱은 5,500보를 기록하고 있었다. '가산바위'가 까마득히 올려다 보였다. 저 바위까지 오르는 것이 이번 종주에서 가장 힘든 구간일 것이다.

절을 오른쪽으로 돌아 절 뒤쪽으로 난 임도를 따라 한참을 가다 보니 또다시 길을 잘못 든 느낌이 들었다. 왼쪽 계곡으로 너무 들어간 것 같았다. 그렇다고 계정사로 되돌아가서 다시 등산을 시작하기엔 너무 멀리 온 것 같아서 나는 산자락을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타고 올라갔다. 잡목 숲에 초피나무의 가시와 거친 너덜겅이 펼쳐져 있어서 걸음이 더뎠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쌓인 눈이 많아졌는데, 10cm쯤 쌓인 눈 위에 두어 사람의 발자국이 찍힌 등산로를 만난 것은 10시 20분, 8,500보를 걸었을 때였다.
 

 

계정사 앞

 

학명동에서 줌인(zoom in)한 가산바위의 모습.

 
12:00, 12,000 가산산성, 그 천상에 올라서다

가산바위 옆 허물어진 성벽 위에 올라서자 온통 눈세상이 펼쳐졌다. 땅 위에 하얗게 쌓인 눈과 숲의 모든 나무에 얼어붙은 눈꽃들… '가산바위'로 오르는 계단도 상고대로 장식되어 있었는데, 머리를 수그리고 그 얼음 터널을 통과하여 바위에 올라섰다. 천상의 세계에 온 느낌이었다. 젊디 젊던 시절에 서너 번 와본 곳이지만 이렇게 눈과 얼음꽃으로 덮인 산성은 처음이다. 아내와 어린 두 아들과 함께 눈썰매를 타러 왔을 때도 상고대가 저렇게 흐드러져 있지는 않았었다.

드넓은 바위와 옆으로 내려다보이는 성벽 위의 길과 사방에 펼쳐진 숲은 모두 설원雪原에 속해 있었지만 그 너머로 더 멀리 내려다보이는 낮은 산과 도시들은 눈은커녕 매연에 덮여 있을 뿐이었다. 80평이나 된다는 너럭바위 위에는 대여섯 사람들이 올라와 있었다. 낯선 사이이지만 그들은 천상에서 만난 기쁨으로 서로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따뜻한 음료수를 권하기도 하였다. 저 아래쪽 세상이었더라면 외면하며 지나갔을 사람들인데…… 나는 그들에게 부탁하여 설경 속에 내가 들어간 사진을 몇 장 찍을 수 있었다.
 

 

허물어진 성터. 동양화 같은 풍경이다.

 

가산바위에 올라가는 계단
가산바위 위에서
가산바위 위에서

 

 

 

이 사진은 위쪽 사진의 왼쪽에 보이는 까마귀를 줌인(zoom in)하여 찍은 것이다.

 
가산바위에서 내려와 성벽 위를 걸었다. 눈 위에 앉을 수는 없어서 중문 옆 성벽 앞에 서서 점심으로 아내가 쪄서 싸준 술빵과 고구마를 먹었다. 팔공산에선 보기 힘든 아름드리 곧은 낙엽송들이 여기선 상고대를 뒤집어쓰고 즐비하게 서 있었다. 이름 모를 조그만 새 한 마리가 나무 밑둥치를 옮겨 다니며 짐짓 무언가를 쪼는 척하면서 한참이나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귀여웠지만, 추위와 눈 속에서 먹잇감 구하기가 힘들어서인지 깃털이 까칠해 보였다.

갈길이 멀어 서둘러야 했다. 중문과 동문을 지났는데 한티재 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예전에 이곳 가산산성에 왔을 때도 그랬지만, 여기선 방향감각을 잃기가 십상이다. 지형이 펑퍼짐한 데다 숲은 울창하고 길은 또 이리저리 얽혀 있기 때문이다. 한 번은 안개가 짙은 날에 왔다가 '링반데룽'이라는 마법에 걸려 속세에 돌아가지 못할 뻔한 적도 있었다. 어제도 한티재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찾을 수가 없어서 지나가는 몇몇 등산객에게 물었더니, 가리키는 방향이 제각각이었다. 하긴 그들도 나처럼 지상에서만 살다가 모처럼 천상에 소풍을 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성벽 위에서 가산바위를 바라보았다.

 

이름 모를 작은 새가 까칠해 보인다.


동문을 지나 성벽 위를 따라가다 보니 한티재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서 있었다. 한티재까지는 5.3km나 된다고 하였다. 여기서부터는 가파른 내리막이어서 많이 미끄러웠다. 챙겨 온 아이젠을 꺼내 신었다. 절벽 위에서 북풍을 맞으며 눈과 상고대를 잔뜩 뒤집어쓰고, 그 무게에 큰 가지가 부러지고 나서도 기품 있게 서 있는 소나무가 우러러보였다. 황지우 시인의 시「소나무에 대한 예배」를 생각했다.
 
   소나무에 대한 예배
   황지우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
   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
   제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이 地表 위에서 가장 기품 있는
   建木; 소나무, 머리의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허물어진 성벽 위에 기품있게 서 있는 소나무

 

 

 

 
 
 14:40, 20,400 치키봉 통과

뒤돌아보니 떠나온 산성이 아득하고, 앞을 보니 가야 할 길이 또한 까마득하다. 높다란 정자와 '치키봉'이라고 쓰인 팻말을 지났는데, 이정표는 한티재까지 아직 4km가 남았음을 알려주었다. 도중에 오르막을 오를 때 허벅지에 두어 번 쥐가 났지만 잠시 서서 허공에 발차기를 하거나 내리막으로 내려갈 때 쥐는 저절로 사라졌다.  
 

 

지나온 가산산성이 아득하다.
산성쪽을 바라보며 줌인한 사진이다.

 

 

멀리 동쪽으론 팔공산이 구름에 가려져 있다.
도중에 만난 정자와 파계사 원당 봉산 표석


16:30, 27,000 한티재 도착

한티재엔 자동차를 타고 올라와 카페에서 차를 마시거나 부근의 능선에서 눈 구경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물론 이곳의 설경은 내가 지나온 길에 비하면 보잘것이 없지만 사람들은 즐거워하고 있었다. 넓은 주차장이 자동차들로 꽉 찰 정도였다. 나는 카페에 들어가 디카페인 카페라테를 한 잔 주문하고, 앉아서 아이젠을 벗고 잠시 쉬었다. 여기서 파계재까지의 거리는 2.1km.
 
17:45, 31,500 파계재 도착
 
드디어 파계재에 도착하였다. 지지난 가을에 낙엽을 밟으며 올라오던 길을 이젠 눈을 밟으며 내려가는 것이다. 이로써 '나이가 더 들기 전에' 팔공산 주능선 종주는 마무리하였으니 앞으로는 틈틈이 가보고 싶은 봉우리나 계곡 위주로 천천히 답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파계재에서 파계사까지는 1.3km였다. 가파른 계곡을 한참 내려와서 길이 완만해지는 곳에 이르러 어디선가 개울이 태어나고 있는지 졸졸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쌓인 눈이 많이 줄어서 그동안 발을 갑갑하게 했던 아이젠을 벗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파계재에 서 있는 이정표들

 

18:20, 34,500 파계사 통과
 
파계사에 도착했을 때는 제법 어두워져 있었고, 문이 활짝 열린 원통전 법당에선 스님 혼자서 목탁소리도 없이 예불을 드리고 있었다. 이 큰 절에서 어찌 스님 한 분만이 예불을 드리고 계시는지, 저녁 공양 시간일 텐데도 경내는 왜 그리 조용한지, 지나가는 이 중생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절마당에서 사진을 한 장 찍을 때 들리는 셔터 소리마저도 너무 크다고 생각되었다. 아직도 주차장까지는 한참 더 내려가야 했으므로 나는 서둘러 절을 떠났다. 18시 50분에 주차장에 도착하여 대기하고 있던 101-1번 버스를 탔다. 아침에 출발할 때와는 달리 여기선 집이 아주 가까웠으므로 버스를 갈아탈 필요도 없이 저녁 7시 조금 지나 귀가할 수 있었다.
 

 

 
 
총걸음수는 37,000보, 걸은 거리는 16km쯤 되는 것 같다.
 
   학명동 ― 계정사
   계정사 ― 가산바위 4.5km   
   가산바위 ― 한티재 6.4km
   한티재 ― 파계재 2.1km   
   파계재 ― 파계사 1.3km
   파계사 ― 주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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