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불시착 - 변혜지

공산(空山) 2024. 3. 18. 09:46

   불시착

   변혜지

 

 

   우리가 인중에 흰 얼룩을 묻히고 다니던 아이였을 때 마을로 들어서는 길목은 우리 것이었다. 줄에 묶은 통나무를 질질 끌고 다니는 것처럼, 우리는 주어진 모든 시간을 그 길목에 묶어두었다.

 

   백까지 세야 돼.

 

   오래된 장승을 중심으로 아이들이 달려나가면, 술래는 시위에 메겨진 화살 같았다. 어떤 날에는 다른 곳으로 튕겨 나가기도 했다.

 

   과실수들이 붉은 열매를 아낌없이 내어주고, 초원의 풀들이 마련해준 잠자리에 누우면 밤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들이 가득했다.

 

   다 함께 장승 놀이를 하자. 부리부리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면서, 우리를 지키자. 잠시도 서로를 떠나지 말자. 코를 훌쩍거리며 나는 모두에게 엄숙하게 제안했고

 

   그곳에서 술래를 놓고 떠난 아이가 돌아올 때까지 오래오래 행복하게 지내기도 했다. 그래도

 

   백까지는 세야 돼. 그렇게 말하고 도망치던 그 모든 아이들을 나는 사랑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 20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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