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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의 방목 - 한기팔

별의 방목 한기팔(1937~2023) 영혼이 따뜻한 사람은 언제나 창가에 별을 두고 산다. 옛 유목민의 후예처럼 하늘의 거대한 풀밭에 별을 방목한다. 우리의 영혼은 외로우나 밤마다 별과 더불어 자신의 살아온 한 생을 이야기한다. 산마루에 걸린 구름은 나의 목동이다. 연못가에 나와 앉으면 물가를 찾아온 양 떼처럼 별들을 몰고 내려와 첨벙거리다 간다.

내가 읽은 시 2024.06.15

눈이 내리다 갠 날 아침 - 한기팔

눈이 내리다 갠 날 아침   한기팔 (1937~2023)     눈이내리다 갠 날 아침   그 아득한 푸름 속을   새 몇 마리 날아와   나뭇가지에 앉아 있네   온 천지가 한 색깔이니   날아갈 하늘이 없네    눈이 내리다 갠 날 아침   이 환한 화엄 속을   늙은 선승이 혼자서   길을 가고 있네   전 우주가 다 보이니   선과 악이 따로 없네

내가 읽은 시 2024.06.14

바다 옆에 집을 짓고 - 한기팔

바다 옆에 집을 짓고   한기팔(1937~2023)     바다 옆에   집을 짓고 살다 보니까   밤이면   파도소리, 슴새 울음소리 들으며   별빛 베고   섬 그늘 덮고 자느니   그리움이 병인 양 하여   잠 없는 밤   늙은 아내와   서로 기댈   따뜻한 등이 있어   서천에 기우는 등 시린 눈썹달이   시샘하며 엿보고 가네.     -----------------------   한기팔 / 1937년 제주도 서귀포 출생. 1975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서귀포』『불을 지피며』『마라도』『풀잎소리 서러운 날』『바람의 초상』『말과 침묵 사이』『별의 방목』

내가 읽은 시 2024.06.14

오디오 마니아들과 함께

오늘 오후엔 두 오디오 마니아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우리집과 가까운 지묘동에 옛 직장 동료가 자기만의 멋진 음악실을 갖추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주에 다른 한 옛 동료와 함께 그곳에 놀러갔었다. 과연 널찍한 공간에 멋진 오디오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 거기서 몇 곡의 연주곡과 좋아하는 옛 노래를 듣다보니 또 다른 오디오 마니아인 초등학교 동기가 생각나서 오랜만에 그에게 문자로 연락을 했었다. 그 친구는 내가 보낸 오디오 시스템 사진을 보더니 '크랑필림 스피커보다 친구가 더 보고 싶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그래서 오늘 오후에 네 사람이 지묘동의 그 음악실에서 만난 것이다. 동기 친구는 우리들에게 '크랑필림' 스피커와 엠프 시스템에 대한 설명을 장황하게 해 주었다. 이 시스템은 대구의 누구..

텃밭 일기 2024.06.13

벚꽃, 가난, 아나키스트 - 장석주

벚꽃, 가난, 아나키스트   장석주 (1954~ )     벚꽃 하얗게 분분히 지고   꽃진 자리에 초록 잎들이 올라온다.   올해의 슬픔은 다 끝났다.   열심히 살 일만 남았다.    가난은 빛이 모자란 것,   구두 밑창이 벌어지는 슬픔을 모르는 것,    해질녘엔 실밥 묻은 옷을 입고   벚꽃 분분히 진 길을 걸었다.    살강의 접시들과 저녁밥 짓던 형수,   옛날의 소년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나 잘못 살지 않았으나   저 초록 잎만큼 후회가 많구나.    당신은 아직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는가?   자, 하얀 달을 받아라.

내가 읽은 시 2024.06.12

공산초등학교 100년사 발간

모교인 공산초등학교는 지난해 10월 2일에 개교 100주년을 맞이했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한 100년사 책이 대여섯 번의 교정쇄를 거쳐 이제야 출판되었다. 책의 목차를 보면, 제Ⅰ부 공산초등학교의 100년의 발자취, 제Ⅱ부 우리나라 교육과 공산 교육 100년, 제Ⅲ부 우리 고장 공산, 제Ⅳ부 함께 나누는 오랜 기억들, 제Ⅴ부 총동창회의 역사와 현황, 제Ⅵ부 개교 100주년 기념사업과 활동, 제Ⅶ부 함께 꾸미는 100주년, 제Ⅷ부 졸업생 명부 등의 순서다. 책은 성실하고 실력 있는 출판사인(이름마저 예쁜!) 민들레피앤씨에서 만들었다. 동문 후배인 그곳 김 사장의 부탁이 있어서 지난해 가을부터 편찬위원으로 합류했던 나는 그동안 원고 교정 업무를 틈틈이 도왔다. 그리고 100년사에 실을 우리 42회 동기회를 ..

텃밭 일기 2024.06.12

옛 동산에 올라

지금 내가 사는 곳은 불로동 옆의 봉무동이고, 행정구역상으론 불로-봉무동이다. 거기서 서쪽으로 금호강을 건너면 검단동이다. 그러니까 불로-봉무동은 금호강을 사이에 두고 검단동과 마주보고 있다. 오늘은 아침을 먹은 후 옛 동산의 하나인 검단동의 앞산에 올라가 보기 위해서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섰다.내가 '옛 동산'이라고 한 것은 검단동이 나와 인연이 깊은 곳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그 산 아래에 외갓집이 있었고, 나중에는 그 외갓집이 이모네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고등학생일 때에는 학굣길이 너무 멀어서 그 이모네에서 학교를 다녔었다. 지금은 그곳에 집을 새로 지어 이종 동생 가족이 살고 있다.굽힌 팔꿈치처럼 돌아서 흘러가는 금호강의 안쪽에 자리 잡은 검단동은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완만한 지형인데, 강을 사이에 ..

텃밭 일기 2024.06.09

이학성의 「내 연애」 해설 - 신상조

내 연애   이학성     내가 바라는 연애는 한시라도 빨리 늙는 것   그래서 은발(銀髮)이 되어 그루터기에 앉아   먼 강물을 지그시 바라보는 것   될 수 있다면 죽어서도 살아   실컷 떠돌이구름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거나   성냥을 칙 그어 시거에 불을 붙이는 것   아니라면 어딘가로 멀리 달아나   생의 꽃술에 입맞춤하는 은나비처럼   한 시절도 그립거나 후회 않노라 고백하는 것   그리하여 누구나의 애인이 되거나   아니 그것도 쉽지 않노라면   그리는 못 되어서 아득하게 잊혀가는 것!     ―시집 『저녁의 신』 (2023)    -----------------------------------    페르소나(persona)는 그리스 어원의 ‘가면’을 나타내는 말로, 칼 융에 따르면 “실제의 ..

해설시 2024.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