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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나들이

오늘은 나의 검진일이라서 아침 7시 열차를 타고 아내와 함께 상경하였다. 여느때와 달리 아내와 함께 상경한 것은 온 가족이 서울의 잠실 쪽에서 저녁을 먹기로 약속이 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달은 맞이와 둘째의 생일이 있는 달인 데다 지난 추석에 아내와 내가 코로나에 걸려 가족들을 못 만났었기 때문에 나의 6개월만의 검진일에 맞춰 서울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병원에서의 검사는 CT를 찍고 채혈을 하는 것으로 11시경에 끝나서 아내와 함께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혜화역에서 4호선 지하철을 타고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역에서 2호선을 갈아탄 후 잠실역에서 내렸다. 저녁 약속 시간까지는 5시간이나 남아 있어서 아내와 나는 먼저 석촌호수로 내려가서 둘렛길을 한 바퀴 걸었다. 산책 나온 사람들이 꽤 많았다. ..

복사꽃 아래 서면 - 박노식

복사꽃 아래 서면 박노식(1962~ ) 복사꽃 아래 서면 문득 내가 비참해진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쓰러져 한 사나흘 푹 잠들고 싶어질 때가 있다 몽중에 누굴 호명할 일도 없겠지만 그래도 고단한 한 생을 만나 서로 꽃잎 먹여주며 몹시 취해서 또 한 사나흘 푹 잠들고 나면, 무언가 잃어버린 것 같고 무언가 잊어버린 것 같은 그래서 아슴한 저녁나절 밖으로 나올 때는 딴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처럼 멍한 나를 발견했으면 한다 복사꽃 아래 새들 머문 적 없으니, 언제쯤 헛것에 끌려가지 않고 언제쯤 그물에 떨어지지 않고 아름다운 이 색계(色界), 무사히 걸어 나갈 수 있을까

내가 읽은 시 2022.11.16

구름의 전쟁놀이 - 이은재

구름의 전쟁놀이 이은재 구름들이 전쟁놀이를 한다 물러설 수 없는 배수진을 치고 일촉즉발의 대치 국면도 잠시 불의 칼이 하늘을 쩍 가르자 천지간을 뒤흔드는 포성이 귓전을 울린다 피바람을 일으키는 구름의 육박전 총알들이 콩 볶듯 땅 위를 박음질하며 팽팽하던 전선이 서서히 무너진다 구름의 전쟁놀이는 승자도 패자도 없이 피아가 전멸하는 것 갠 하늘, 구름 한 점 없다 ―《대구문학》 182호(2022년 11월호) ■이은재 / 2013년《월간문학》등단. 시집『나무의 유적』출간. 대구문학상 수상.

내가 읽은 시 2022.11.15

동창들과의 소풍

어제는 국민학교 동기생들과 함께 멀리 서해 대천 바닷가로 가을소풍을 다녀왔다. 아침 8시에 출발한 대형버스엔 모두 29명이 타서 빈 좌석이 많았다. 나는, 코로나가 다시 확산하는 추세에 있는 때에 밀폐된 버스 안에서 종일 시달릴 것을 생각하면 가고 싶지 않았으나, 회장의 권유에 못 이겨 참석하게 되었다. 코로나 때문에 한동안 모임이 없었는데, 몇 년만에 가는 동기회 소풍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버스가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얼마 가지 않아 음주가무는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그 오랜 세월 동안에 몸에 밴 희노애락을 각자의 십팔번에 실어 모두 풀어놓는 듯하였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차창을 커튼으로 가리고 통로에 나와 디스코 메들리에 맞춰 이른바 '관광버스 춤'을 추었다. 내가 젊었을 적에는 행락철에 길을 가..

늦옥수수를 꺾으며

지난봄에는 고구마와 콩을 심을 텃밭의 맨 북쪽 가에 옥수수를 한 이랑 심었었다. 옥수수는 키가 커서 다른 작물에 그늘을 드리울 수 있기 때문에 북쪽 이랑에다 심은 것이다. 내가 해마다 옥수수를 심는 것은 삶아서 간식으로 먹는 그 맛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이른봄 언땅이 녹고 나서 가장 먼저 파종을 하는 작물 중 하나여서 싹이 파릇파릇 돋아나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이 늦가을에 심은 마늘의 싹을 보는 것에 못지않게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의 옥수수 농사는 순조롭지 못했다. 웃거름 주기와 물 주기를 잘 해서 옥수숫대는 튼튼하게 자랐지만, 해마다 그랬던 것처럼 옥수수가 익어갈 무렵에 텃밭에 산짐승이 들어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미리 울타리를 쳐서 대비를 했었지만, 높다란 울타리는 고라니만..

텃밭 일기 2022.11.11

끝 외 3편 - 정현종

끝 정현종 끝이라고 하지만 언제가 끝인가요. 끝이라고 하지만 어디가 끝인가요. 이때 저때가 다 끝이고 여기저기가 다 끝인 줄 아오나, 그렇기는 하오나, 마음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요, 마음은 끝이 없습니다. ----------------- 있기도 전에 사라지는구나 정현종 미래에 있을 일이 어느덧 지나가고 지나가고, 그 일이 오기도 전에 지나가고 지나가고, 뚜렷하고 아득하다 그 견딜 수 없는 환영들! 있기도 전에 사라지는구나 있기도 전에 사라지는구나! ---------------- 놀다 정현종 괴로움을 견디느라 괴로움과 놀고 슬픔을 견디느라 슬픔과 놀고 그러다가 노는 것도 싫어지면 싫증하고 놀고…… ------------------------- 공터―시 이야기 정현종 시는 처음부터 공터이다. 시는 끝까지 ..

내가 읽은 시 2022.11.11

자전거와 함께 왕건길을

시월 하순에 접어든 뒤부터는 기온이 많이 떨어진 데다 해가 짧아져서 춥고 어두운 새벽에 자전거를 타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요즘엔 햇살이 강하지 않으면서도 공기가 푸근한 해거름에 저녁노을 아래서 탄다. 곧 겨울이 와서 날이 더 추워지면 햇볕이 따사로운 오후 시간으로 앞당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특별히 가 볼 데가 있어 점심을 먹은 뒤 일찌감치 나의 애마인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섰다. 나는 4년 전 겨울에 아내와 함께 용수천의 작은 다리 '부남교'를 건너 '하늘마루'―거저산―열재―소원만디 전망대―한실골―신숭겸장군 사당―파군재―봉무동까지 '왕건길'을 등산한 적이 있었다. 오늘은 거꾸로 봉무동―파군재―신숭겸장군 사당―한실골―소원만디 전망대―열재―내동―공산터널옆 옛길―파군재―봉무동까지 자전거를 타고 ..

텃밭 일기 2022.11.06

유병록의 「딛고」 감상 - 나민애

딛고 유병록(1982~ ) 선한 이여 나에게 바닥을 딛고 일어서라 말하지 마세요 어떻게 딛고 일어설 수 있을까 네가 활보하다가 잠들던 땅을, 나를 기다리던 땅을 두 팔에 힘을 잔뜩 주고서 구부러진 무릎을 펼쳐서 어떻게 너를 딛고 일어설 수 있을까 여기는 이미 깊은 수렁인데 선한 이여 손 내밀어 나를 부축하지 마세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여기에 너의 웃음과 울음을 두고서 나를 부르던 목소리와 너의 온기를 두고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모두 묻어두고서 떠날 수 있을까 여기는 이미 나에게도 무덤인데 ------------------------- 16세기의 허난설헌은 두 아이를 잃고 나서 ‘곡자(哭子)’라는 시를 썼다. 어린 자식을 잃은 심정이 어찌나 서럽던지 시인은 피눈물로 울음소리 삼킨다고 표현했다. 그..

해설시 2022.11.06

이윤설의 「재에서 재로」 감상 - 신미나

재에서 재로 이윤설(1969~2020) 꿈에 당신이 찾아온 어제는 둘이 서먹하니 마루에 앉아 있습니다 빈 쟁반의 보름달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당신이 내 옆에 가까이 있어 본 지도 하도 오래되었는데, 내가 부른 것도 아닌데 나는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늘엔 미워 불러볼 이름 하나 없이 맑고 잡초 자란 마당가에 우리 둘이 소복하니 무덤처럼 앉아 말없이 백 년 동안 한 얘길 하고 또 하며 당신이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지러지는 달의 얼굴이 소금처럼 소슬하고 짠 빛으로 와서 우리의 식은 재를 만져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가벼이 고운 가루인 줄 몰랐을 때도 있었습니다 조용히 산이 마루로 다가와 당신을 보자기에 싸듯 덮어 달쪽으로 데려가도록 나는 꿈에도 오지 않을 것을 알았습니다 용서가 그런 ..

해설시 2022.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