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사꽃 아래 서면
박노식(1962~ )
복사꽃 아래 서면
문득 내가 비참해진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쓰러져
한 사나흘 푹 잠들고 싶어질 때가 있다
몽중에 누굴 호명할 일도 없겠지만
그래도 고단한 한 생을 만나
서로 꽃잎 먹여주며 몹시 취해서
또 한 사나흘 푹 잠들고 나면,
무언가 잃어버린 것 같고
무언가 잊어버린 것 같은
그래서 아슴한 저녁나절 밖으로 나올 때는
딴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처럼
멍한 나를 발견했으면 한다
복사꽃 아래 새들 머문 적 없으니,
언제쯤 헛것에 끌려가지 않고
언제쯤 그물에 떨어지지 않고
아름다운 이 색계(色界),
무사히 걸어 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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