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일기

늦옥수수를 꺾으며

공산(功山) 2022. 11. 11. 19:09

지난봄에는 고구마와 콩을 심을 텃밭의 맨 북쪽 가에 옥수수를 한 이랑 심었었다. 옥수수는 키가 커서 다른 작물에 그늘을 드리울 수 있기 때문에 북쪽 이랑에다 심은 것이다. 내가 해마다 옥수수를 심는 것은 삶아서 간식으로 먹는 그 맛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이른봄 언땅이 녹고 나서 가장 먼저 파종을 하는 작물 중 하나여서 싹이 파릇파릇 돋아나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이 늦가을에 심은 마늘의 싹을 보는 것에 못지않게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의 옥수수 농사는 순조롭지 못했다. 웃거름 주기와 물 주기를 잘 해서 옥수숫대는 튼튼하게 자랐지만, 해마다 그랬던 것처럼 옥수수가 익어갈 무렵에 텃밭에 산짐승이 들어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미리 울타리를 쳐서 대비를 했었지만, 높다란 울타리는 고라니만 뛰어넘지 못하게 막았을 뿐 너구리처럼 울타리를 타고 넘어 들어오는 놈들은 막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넓은 그물을 구해 옥수숫대를 감싼 뒤에야 겨우 남아 있던 옥수수를 지킬 수 있었다.

그렇게 지킨 옥수수가 익어서 꺾을 무렵이었다. 아내는 다시 빈 자리에다 늦옥수수를 조금 파종했었다. 7월 하순의 뜨거운 더위에도 옥수수는 싹이 트고 무럭무럭 잘 자랐지만 텃밭에는 또 불청객이 찾아왔다. 9월초에 태풍이 와서 옥수숫대를 모두 쓰러뜨린 것이다. 쓰러진 옥수숫대를 일으켜 세우자니 더 다치게 할 것 같아 그대로 두었었는데, 옥수숫대는 쓰러진 채 허리만 꼿꼿이 세우며 기어이 열매를 맺고 키웠다.

봄에 심은 올옥수수 같았으면 수염이 나오고 얼마 가지 않아 알이 영글었을 텐데 이 늦옥수수는 수염이 난 지 한 달이 지나도 수염이 마르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수염이 마르지 않는다는 것은 옥수수가 영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밤마다 더해져 오는 추위와 싸우며 엷어진 햇볕으로 옥수수알을 영글게 하기 위해 옥수숫대는 분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계절은 어김없이 가고 와서 며칠 전에는 마침내 서리가 흠뻑 내리고 말았다. 추위에 약한 호박잎과 콩잎이 주저앉았고 옥수숫잎도 덩달아 마르고 말았다. 아내와 나는 너무 늦게 심은 것을 후회하며 포기했던 옥수수를 그래도 꺾어 보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몇 개의 옥수수는 알이 차고 영글어 있었다. 늦게 맺은 열매를 추위가 닥치기 전에 영글게 하려고 옥수숫대는 얼마나 많이 애썼을까. 그 옥수숫대가 마치 뒤늦게 하나 얻은 아들 걱정만 하며 평생을 살다 가신 내 부모님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것은 옥수숫대뿐만 아니다. 푸른 열매를 매단 채로 서리를 맞은 토마토 덩굴과 호박덩굴, 마당가에서 철 지나 피었다가 그대로 말라버린 장미, 늦게까지 피어 있는 국화 송이와 용담꽃, 그리고 거기에 서성이는 나비와 벌들, 발 아래서 바스락거리는 낙엽들마저도 눈물겹다. 바야흐로 '촉목상심(觸目傷心)'의 계절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