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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의 「조그만 사랑 노래」 해설 - 최영미, 나민애

조그만 사랑 노래 황동규(1938~ )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 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가득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의 눈. ------------------------- ‘어제를 동여맨 편지’라니 참 멋진 표현이다. 길이 사라지면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기 마련이나, 뒤가 반복되며 서로를 부정하는 행이 시적 긴장감을 높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다. 공기놀이를 하도 해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였는데, 내가 갖고 놀던 돌은 다 어디..

해설시 2023.01.19

겨울사랑 - 고정희

겨울사랑 고정희 (1948~1991) 그 한 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 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 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 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 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 번의 이윽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읽은 시 2023.01.12

장옥관의 「없는 사람 」 해설 - 소유정

없는 사람 장옥관 오피스텔 문을 따고 들어가니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없는 게 아니라 꽉 채우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과 거실을 메우고 복도와 엘리베이터와 이웃집 문틈으로 스며든 이유가 외로움 때문이라고 예단해선 안 된다 단지 그는 갑갑했을 뿐이다 갑갑함이 저 스스로 몸 부풀려 이웃 집 현관문을 노크한 것일 게다 경계를 벗어나 공기를 장악한 그는 원래부터 바람이었다 오십이 넘도록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다니며 공간을 확장하고 저를 부풀렸다 미처 따라가지 못한 뼈는 화장실 문턱에 가지런히 누워 스멀스멀 구더기를 불러 들였다 날개를 달아주기 위해서였다 견디다 못해 이웃들이 문 따고 들어가니 낡은 소파 밑에서 그가 키우던 포메라니안이 꼬리 흔들며 기어 나왔다고 한다 도대체 무얼 먹었는지 통통하게 살이 오른 개는..

해설시 2023.01.12

톱과 귤 - 유희경

톱과 귤 —고백 유희경 톱을 사러 다녀왔습니다 가까운 철물점은 문을 닫았길래 좀 먼 곳까지 걸었어요 가는 길에 과일가게에서 귤을 조금 샀습니다 오는 길에 사면 될 것을 서두르더라니 내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귤 담은 비닐봉지가 톱니에 걸려 찢어지고 말았지 뭔가요 후드득 귤 몇 개가 떨어져 바닥에 굴렀습니다 귤을 주워 주머니마다 가득 채우고 돌아왔습니다 아는 얼굴을 만나 귤 몇 개 쥐어주기도 했습니다 한두 개쯤 흘린 것 같은데 찾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 귤이 자라 귤나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귤을 심으면 귤이 자라나나요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귤 나무가 자라면 이 톱으로 가지치기를 해야겠다고 혼자 웃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가지고 온 귤은 모두 꺼내두었는데도 그 뒤로 한 며칠 주머니에서 귤 냄새가 가시지..

내가 읽은 시 2023.01.08

저녁 한때 - 임길택

저녁 한때 임길택(1952~1997) 뒤뜰 어둠 속에 나뭇짐을 부려놓고 아버지가 돌아오셨을 때 어머니는 무 한 쪽을 예쁘게 깎아 내셨다. 말할 힘조차 없는지 무쪽을 받아든 채 아궁이 앞에 털썩 주저앉으시는데 환히 드러난 아버지 이마에 흘러 난 진땀 마르지 않고 있었다. 어두워진 산길에서 후들거리는 발끝걸음으로 어둠길 가늠하셨겠지. 불타는 소리 물 끓는 소리 다시 이어지는 어머니의 도마질 소리 그 모든 소리들 한데 어울려 아버지를 감싸고 있었다.

내가 읽은 시 2023.01.03

홀로 아닌 홀로 - 정채원

홀로 아닌 홀로 정채원 얼음과 먼지투성이 행성이 돌고 있다고 보이저호를 타고 가도 10만 년 거리라고 내 주위를 돌고 있는 다른 별이 있다는 걸 나도 알 수 있지 홀로 있어도 자주 흔들리니까 이따금 뜨거운 흐느낌이 밀려오니까 익룡이라도 되어 쥐라기 때 그를 향해 출발했더라면 지금쯤 만났을지도 몰라 다른 별의 파편이 수없이 박혀 있는 그 별의 표면 온도는 영하 170도 두 팔 힘껏 벌려도 안을 수 없는 대부분의 아픈 별들은 다른 별을 돌고 있어 막막한 우주에서 홀로 있지 않아 오래 춥고 어지러운 밤이면 나도 누군가를 맴돌고 있지 얼어붙은 입김을 불어 내면서 그의 한숨과 눈썹 표정을 받아쓰기도 하면서 ―『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천년의시작, 2022

내가 읽은 시 2022.12.17

자작시 해설 「쇠소깍, 남쪽」- 강영은

쇠소깍, 남쪽 강영은 소가 드러누운 것처럼 각이 뚜렷한 너를 바라보는 내 얼굴의 남쪽은 날마다 흔들린다 창을 열면 그리운 남쪽, 살청빛 물결을 건너는 것을 남쪽의 남쪽이라 부른다면 네 발목에 주저앉아 무서워,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무서움보다 깊은 색, 살이 녹아내린 남쪽은 건널 수 없다 눈이 내리면 너도 두 손을 가리고 울겠지 눈 내리는 날의 너를 생각하다가 북쪽도 남쪽도 아닌 가슴팍에 글썽이는 눈을 묻은 젊은 남자의 비애를 떠올린다 흑해의 지류 같은 여자를 건너는 것은 신분이 다른 북쪽의 일, 구실잣밤나무 발목 아래 고인 너는 따뜻해서 용천수가 솟아나온 너는 더 따뜻해서 비루한 아랫도리, 아랫도리로만 흐르는 물의 노래, 흘러간 노래로 반짝이는 물의 살결을 무어라 불러야 하나 아직도 검푸른 혈흔이 남아 ..

해설시 2022.12.01

터미널 1 - 이홍섭

터미널 1 이홍섭 젊은 아버지는 어린 자식을 버스 앞에 세워놓고는 어디론가 사라지시곤 했다 강원도 하고도 벽지로 가는 버스는 하루 한 번뿐인데 아버지는 늘 버스가 시동을 걸 때쯤 나타나시곤 했다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대병원으로 검진 받으러 가는 길 버스 앞에 아버지를 세워놓고는 어디 가시지 말라고, 꼭 이 자리에 서 계시라고 당부한다 커피 한 잔 마시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벌써 버스에 오르셨겠지 하고 돌아왔는데 아버지는 그 자리에 꼭 서 계신다 어느새 이 짐승 같은 터미널에서 아버지가 가장 어리셨다 — 『강릉, 프라하, 함흥』 1998

내가 읽은 시 2022.11.29

11월 - 이영옥

11월 이영옥(1960~ ) 나를 한 장 넘겼더니 살은 다 발라 먹고 뼈만 남은 날이었다 당신이 나뭇가지에 매달렸던 나의 마지막 외침을 흔들어 버리면 새가 떨어진 침묵을 쪼아 올리는 것이 음악이라고 생각했다 텅 빈 하늘 아래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목소리는 누구인가 깊고 깊어서 부스러기도 없이 뼈만 앙상하게 만져지는 기억들 미처 사랑해 주지 못했던 사랑처럼 남겨진 몇 개는 그냥 두기로 했다 오래된 노래처럼 내 귓속에서 흥얼거리며 살도록

내가 읽은 시 2022.1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