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 하순에 접어든 뒤부터는 기온이 많이 떨어진 데다 해가 짧아져서 춥고 어두운 새벽에 자전거를 타는 것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요즘엔 햇살이 강하지 않으면서도 공기가 푸근한 해거름에 저녁노을 아래서 탄다. 곧 겨울이 와서 날이 더 추워지면 햇볕이 따사로운 오후 시간으로 앞당겨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특별히 가 볼 데가 있어 점심을 먹은 뒤 일찌감치 나의 애마인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섰다.
나는 4년 전 겨울에 아내와 함께 용수천의 작은 다리 '부남교'를 건너 '하늘마루'―거저산―열재―소원만디 전망대―한실골―신숭겸장군 사당―파군재―봉무동까지 '왕건길'을 등산한 적이 있었다. 오늘은 거꾸로 봉무동―파군재―신숭겸장군 사당―한실골―소원만디 전망대―열재―내동―공산터널옆 옛길―파군재―봉무동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녀왔다. '왕건길'의 일부 구간에서 자전거를 타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한실골은 완만한 오르막길이어서 요즘 한창 재미를 붙이고 있는 '댄싱'을 연습하며 오르기에 좋았다. 그러나 막바지의 가파른 오르막에서는 연식이 오래된 엔진(?)으로선 역부족이어서 자전거를 끌고 소원만디 전망대까지 올라갔다. 전망대에서 열재를 거쳐 내동까지는 또 너무 가파른 내리막인 데다 좁은 산길이어서 걸어서 내려왔다. 내동 속골부터는 완만한 포장도로여서 공산터널 앞까지 3km 구간을 신나게 타고 내려올 수 있었다. 자동차가 많이 다니는 공산터널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터널 옆의 옛 고갯길을 넘어왔다. 왕복 2차선인 옛길의 아스팔트는 아직 거기 그대로 있었다. 지나가는 차도 사람도 없어 고즈넉했지만 단풍은 가는 계절을 아쉬워하는 듯 저들끼리 흐무러져 있었다.
이 고갯길이 나기 전에는 지금의 공산댐 안쪽으로 오래된 도로가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적 어느 가을날이었다. 부모님이 싸 주신 쌀을 한 말 짊어지고 시오리 길을 걸어 내려와 버스를 기다렸으나 동화사 종점에서부터 단풍놀이객들로 만원이 된 버스가 정류장에 세워 주지 않아서 그 오래된 길을 따라 불로동까지 걸었던 적이 있었다. '문바우'를 지나고 면사무소에 이를 때까지 동화천을 따라 '공산' 자락을 굽이굽이 돌아가던 그 길이 얼마나 지루했던지.
그 오래된 도로가 공산댐에 수몰되는 바람에 공산과 '응봉' 사이로 신설된 것이 바로 이 고갯길이다. 댐이 1979년에 착공되어 1982년에 완공되고 터널은 2001년도에 완공되었으니, 이 고갯길은 20년 남짓만 사용되었던 셈이다. 눈이 많이 내려서 버스가 이 고개를 넘지 못한 때도 많았었다. 그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 길을 잊고 살아온 지도 벌써 21년째다. 길은 다니지 않으면 잊혀지게 마련이다. 만나지 않으면 잊혀지고 마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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