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1954

구릉 - 강대선

구릉 강대선(1971~ ) 아가미를 버들가지에 꿰인 메기가 탁자에 앉아 있다 딸려온 물빛이 거무스름하다 물내가 전부였을 것 같은 저 입으로 뻐끔거리는 허공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고향을 바라보려는 듯 눈을 부라린다 수염은 그가 한 마을의 유지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구릉이 실은 고분이었다는 구깃구깃한 신문기사가 메기 앞에 놓인다 고분에는 왕이었을 어쩌면 한 고을의 유지였을 사람의 뼈와 금으로 된 장신구가 신발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고 한다 신발이 수염이었을까 구릉속으로 유영을 하는 메기가 버들가지를 빠져 나온다 한때는 잘 나갔던 기억으로 살아온 주인장이 하품을 한다. 눈물이 찔끔거리는 메기가 끓는 탕 속으로 몸을 던진다 구릉은 왠지 메기의 잘 나가던 한 때처럼 쓸쓸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신발처럼 남겨진 버..

내가 읽은 시 2023.03.19

소금창고 - 이문재

소금창고 이문재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그시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 번 더 피어 있다 눈부시다 소금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 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 수은처럼 굴러다닌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 떼를 세어보는데 젖은 눈에서 눈물 떨어진다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제국호텔』 2004.

내가 읽은 시 2023.03.14

푸른 밤 - 나희덕

푸른 밤 나희덕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그곳이 멀지 않다』민음사 1997.

내가 읽은 시 2023.02.25

세상에 처음 오신 분을 환영함

오늘 아침 여덟 시 조금 지나 세상에 처음 오신 어여쁜 사람 한 분. 아직 이름도 부여받지 못한 그이는 바로 나의 손녀다. 부모가 서울 근교에 살고 있어서 그는 서울의 한 병원에서 태어났는데, 덕분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아내와 나는 멀리서 몇 장의 사진과 짧은 동영상으로만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화창하고 푸근한 이른봄 날씨가 새 생명의 탄생을 축복해 주었다. 우리 온 가족도 새 식구를 맞이하여 축복을 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아가야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다. 그리고 오기를 참 잘 했다. 세상은 아무튼 살아볼 만한 아름다운 곳이니! 엄마 배 속에 비해 세상이 너무 밝은지 아직 눈을 감은 채 강보에 싸여 있었지만, 짙은 머리숱과 밝은 얼굴빛이 태어난 지 몇 달 지난 아이 같았다. 우는 모습이 담긴 동..

텃밭 일기 2023.02.21

겨울, 횡계 - 박제영

겨울, 횡계 박제영 대관령의 그림자가 길어지면 횡계는 조금씩 겨울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산그늘 아래 지난 계절 부려놓았던 황태덕장들도 다시 세워질 테지요 러시아 오호츠크해의 차가운 심연을 지나던 명태들이 컨테이너에 실려 오겠지요 대관령자락 횡계리 황태덕장에 줄줄이 꿰여 매달리겠지요 삼동의 바람과 눈을 맞으며 간신히 바다를 잊을 무렵이면 바다의 명태를 버린 몸들이 횡계의 황태가 되어갈 테지요 눈 덮인 덕장에 고드름처럼 매달린 황태들이 어쩌면 나를 버린 옛 애인들 같다는 생각 눈이 푹푹 쌓인 숙취의 겨울 아침, 횡계 식당에서 뜨거운 황태해장국을 먹어본 적 있는지요 당신을 버린 옛 애인들, 그 뜨거운 것들을 후후 불며 삼켜본 적 있는지요 대관령의 그림자가 길어지면 횡계는 마침내 겨울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삼동의 ..

내가 읽은 시 2023.02.17

아침 - 박경리

아침 박경리(1926~2008) 고추밭에 물주고 배추밭에 물주고 떨어진 살구 몇 알 치마폭에 주워 담아 부엌으로 들어간다 닭모이 주고 물 갈아주고 개밥 주고 물 부어주고 고양이들 밥 말아주고 연못에 까놓은 붕어새끼 한참 들여다본다 아차! 호박넝쿨 오이넝쿨 시들었던데 급히 호스 들고 달려간다 내 떠난 연못가에 목욕하는 작은 새 한 마리 커피 한 잔 마시고 벽에 기대어 조간 보는데 조싹조싹 잠이 온다 아아 내 조반은 누가 하지? 해는 중천에 떴고 달콤한 잠이 온다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마로니에북스, 2008.

내가 읽은 시 2023.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