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시

유병록의 「딛고」 감상 - 나민애

공산(空山) 2022. 11. 6. 11:10

   딛고

   유병록(1982~ )

 

 

   선한 이여
   나에게 바닥을 딛고 일어서라 말하지 마세요


   어떻게 딛고 일어설 수 있을까
   네가 활보하다가 잠들던 땅을나를 기다리던 땅을


   두 팔에 힘을 잔뜩 주고서
   구부러진 무릎을 펼쳐서


   어떻게 너를 딛고 일어설 수 있을까
   여기는 이미 깊은 수렁인데


   선한 이여
   손 내밀어 나를 부축하지 마세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여기에 너의 웃음과 울음을 두고서
   나를 부르던 목소리와
   너의 온기를 두고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모두 묻어두고서


   떠날 수 있을까
   여기는 이미 나에게도 무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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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의 허난설헌은 두 아이를 잃고 나서 곡자(哭子)’라는 시를 썼다어린 자식을 잃은 심정이 어찌나 서럽던지 시인은 피눈물로 울음소리 삼킨다고 표현했다그 후로부터 몇백 년이 지났다지금은 허난설헌의 시대와 같지 않고 이 땅에는 변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다그렇지만 모든 게 변했다는 것은 착각이다자식 잃은 부모형제 잃은 가족친구 잃은 사람들에게는 허난설헌의 피 토하는 심정이 멀지 않다.
   이 또한 모두 지나가리라고 말할 수 없다훌훌 털고 어서 일어나라고 독려할 수가 없다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 수가 없다어려움을 극복하고 밝은 미래로 나아가자는 시는 많고 많지만 지금은 그런 시들을 추천할 수 없다사회가 키워내야 할 어린 영혼이 너무 많이 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아는 가장 아픈 시를 함께 읽는다해설할 수도 없이 가장 아픈 마음을 함께 읽는다허난설헌의 자식 잃은 슬픔은 사백 년이 지나도 잦아들지 않았다시인의 슬픔은 시 밖으로 철철 넘쳐흐른다오늘의 슬픔이 그 슬픔과 다를 리 없고 다를 수 없다.

  나민애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