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1954

일 잘하는 사내 - 박경리

일 잘하는 사내 박경리(1926~2008)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 젊은 눈망울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 내 대답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울었다고 전해 들었다 왜 울었을까 홀로 살다 홀로 남은 팔십 노구의 외로운 처지 그것이 안쓰러워 울었을까 저마다 맺힌 한이 있어 울었을까 아니야 아니야 그렇지 않을 거야 누구나 본질을 향한 회귀본능 누구나 순리에 대한 그리움 그것 때문에 울었을 거야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마로니에북스, 2008.

내가 읽은 시 2023.02.11

어머니 - 박경리

어머니 박경리(1926~2008) 어머니 생전에 불효막심했던 나는 사별 후 삼십여 년 꿈속에서 어머니를 찾아 헤매었다 고향 옛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서울 살았을 때의 동네를 찾아가기도 하고 피난 가서 하룻밤을 묵었던 관악산 절간을 찾아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전혀 알지 못할 곳을 애타게 찾아 헤매기도 했다 언제나 그 꿈길은 황량하고 삭막하고 아득했다 그러나 한 번도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다 꿈에서 깨면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그 사실이 얼마나 절실한지 마치 생살이 찢겨 나가는 듯했다 불효막심했던 나의 회한 불효막심의 형벌로서 이렇게 나를 놓아주지 않고 꿈을 꾸게 하나 보다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마로니에북스, 2008.

내가 읽은 시 2023.02.11

옛날의 그 집​ - 박경리

옛날의 그 집 박경리(1926~2008) ​ ​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

내가 읽은 시 2023.02.11

입사동기들의 소풍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가장 긴 세월을 함께 보낸 친구들이 있다면 그건 입사동기들이겠다. 20대 중반의 젊은 시절이던 1982년 봄에 입사하여 30년 하고도 몇 년씩을 더 직장에서 희로애락을 함께했었다. 우리 동기들은 다른 기수들에 비해 입사 연령이 좀 늦은 편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부터 진급에 대한 욕심이 적었던 반면에 그 치열한 공채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때문인지 자존감이 높은 편이었다. 신사적이며 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어서 생산기술 파트의 업무를 묵묵히 창의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오늘은 그 동기들이 부산으로 소풍을 가기로 한 날이다. 예전에 재직 중일 때부터 동기들과의 소풍은 연례행사였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하여 4년여 만에 가게 된 소풍이었다. 아침에 동대구역과..

톱을 쓸었다

내게는, 아니 우리집에는 아버지가 생전에 사용하시던 톱이 두 자루 있다. 하나는 큰 톱이고, 다른 하나는 큰 톱에 비해 폭과 길이와 이빨의 크기가 작은 톱이다. 작은 톱은 몇 해 전에 벌초를 하면서 연장을 다루는 데 서툰 재종질(再從姪)이 톱날 끝부분을 부러뜨린 것을 내가 그라인더로 다듬어서 길이가 예전보다 더 짧아졌다. 아버지 돌아가신지가 15년째이니 작은 톱의 나이는 한 서른 살은 된 것 같다. 큰 톱은 당신께서 사 오신 뒤 몇 년밖에 사용하지 못하셨으니 스무 살 남짓 되었겠다. 어제 산가에 다녀오면서 빈집을 지키고 있던 그 두 자루의 톱을 아파트로 가지고 왔다. 산가는 춥기 때문에 따뜻한 아파트에서 오랜만에 톱을 쓸어 보기 위해서였다. 톱을 가지고 오면서 철물점에 들러서 줄도 하나 샀다. 새 줄은 ..

텃밭 일기 2023.01.27

목련 - 이대흠

목련 이대흠 사무쳐 잊히지 않는 이름이 있다면 목련이라 해야겠다 애써 지우려 하면 오히려 음각으로 새겨지는 그 이름을 연꽃으로 모시지 않으면 어떻게 견딜 수 있으랴 한때 내 그리움은 겨울 목련처럼 앙상하였으나 치통처럼 저리 다시 꽃 돋는 것이니 그 이름이 하 맑아 그대로 둘 수가 없으면 그 사람은 그냥 푸른 하늘로 놓아두고 맺히는 내 마음만 꽃받침이 되어야지 목련꽃 송이마다 마음을 달아두고 하늘빛 같은 그 사람을 꽃자리에 앉혀야지 그리움이 아니었다면 어찌 꽃이 폈겠냐고 그리 오래 허공으로 계시면 내가 어찌 꽃으로 울지 않겠냐고 흔들려도 봐야지 또 바람에 쓸쓸히 질 것이라고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이라고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2018

내가 읽은 시 2023.01.22

겨울에 만나서 더 반가운 친구들 ㅡ 호접란과 동백

겨울은 텃밭에 나갈 일이 많지 않는 농한기라서 적적하기도 하지만 마음이 좀 여유로워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겨울에도 실내에서 꽃을 피우는 호접란을 한 포기 키워보고 싶어졌다. 유튜브에서 호접란 키우기를 검색하여 공부를 좀 하고 나서 홍자색 꽃이 아름다운 '만천홍'이라는 품종 두 포기를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배달 과정에서 동해를 입지 않도록 보온재로 꼼꼼히 포장한 박스를 조심스레 뜯었을 때, 거기엔 뜻밖에도 순백색 꽃을 피운 것도 한 포기 들어 있었다. 난원에서 서비스로 다른 품종을 한 포기 더 보낸 것이었는데, 반갑고 고마웠다. 흰 꽃은 꽃대가 하나였지만 만천홍은 포기마다 꽃대가 두 개씩이었고, 꽃대의 아래쪽 꽃은 활짝 피어 있었다. 애초에 두 포기를 주문한 것은 설에 아들이 오면 한 포기를 ..

텃밭 일기 2023.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