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1954

기장에 갔다가

하루 휴기를 내고 부모와 함께 바닷바람을 쐬겠다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아내와 나는 아침에 차를 몰고 집을 나섰다. 한 시간 20분을 달려 언양의 아들이 사는 아파트에 들렀다가 그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기장군 일광읍의 바닷가로 갔다. 그곳 바닷가의 한 음식점*에서 조금 이른 점심으로 전복죽을 먹었다. 전복죽은 쌉살한 성게 알이 들어 있어서 맛이 더 있었다. 전복구이를 곁들여 먹어서 배가 불렀다. 그리고 거기서 멀지 않은 바닷가의 한 카페**에서 차를 마셨는데, 오늘 들른 음식점과 카페는 모두 아들이 전에 가보았던 곳으로서 음식이나 분위기가 좋게 느껴지던 곳이란다. 카페는 이름 있는 건축가가 지은 곳이었다. 발코니나 옥상에 놓인 푹신한 소파에서 바닷바람과 전망을 즐기도록 되어 있었다. 그 카페에서는 고리 원..

귀한 마주침, 텅 빈 충만 - 엄원태

귀한 마주침, 텅 빈 충만 엄원태 목요일 늦은 오후, 텅 빈 강의실 복도에서 쓰레기통을 비우고 있는 청소 아주머니와 마주친다. 눈이 마주치자 몸피가 조그만 아주머니는 내게 다소곳이 허리 굽혀 인사를 한다. 내가 마치 ‘높은 사람’이라도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공손한 인사. 무슨 종류일지 짐작 가는 바 없지 않지만, 아마도 어떤 ‘결핍’이 저 아주머니의 마음에 가득하여서, 마음자리를 저리 낮고 겸손하게 만든 것이겠다. 저 나지막한 마음의 그루터기로 떠받치고 품어 안지 못할 것이 세상에 있기나 한 것일까? 아주머니, 쓰레기들을 일일이 뒤적여 종이며 캔과 병 같은 것들을 골라내어 따로 챙긴다. 함부로 버려진 것들에서 ‘소중한 어떤 것’을 챙기는 사람 여기 있다. 아주머니는 온몸으로, 시인이다.

내가 읽은 시 2023.04.27

이 동물원을 위하여•서 - 엄원태

이 동물원을 위하여•서 엄원태(1955~ ) 누가 만든 동물원인지 동물원 하나가 거대한 공중 구조물처럼 도시를 뒤덮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나무와 풀, 꽃들이 쫓겨난 자리에 짐승들이 발호하여, 붉은 아가리로 포효하거나 날카로운 발톱으로 서로를 할퀴고 물어뜯으며 광범위한 백색소음 지대를 만들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짐승이 되는 풍조라, 자신이 어느 훌륭한 조련사에게 길든 줄도 모른다.) 주인이 불분명한 이 동물원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지상의 집들과 방 안까지 짐승의 누린내를 피운다. 사람들이 모두 짐승이 되어가는 까닭이다. 짐승들 중의 어떤 놈은 자기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초식성에서 잡식성을 거쳐 육식성으로 진화해가기 바쁜 나날이다. 결사의 자유를 부여받아 (누구로부터인지는 불분명하다.) 거리로 나서고,..

내가 읽은 시 2023.04.27

이 동물원을 위하여•10 - 엄원태

이 동물원을 위하여•10 —기호지세 엄원태 개원 이래 처음이었다 한 관광객이 사파리 버스 뒷자리에서 졸다가 차가 급히 출발하는 바람에 나동그라지며 낙상당한다 떨어진 곳이 마침 잠든 왕 호랑이 등 쪽이어서 자다가 너무 놀란 범이 냅다 전속력으로 달리며 마구 포효하는 바람에 위태위태 등에 올라앉은 그이는 졸지에 범국가적인 관심의 주인공이 되었다 얼마나 잘 달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잘 뛰어내려야 살아남을 것인가 하는 절박한 생존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었지만, 달리는 거대한 범에 올라탄 그 모습이 언뜻 호걸의 풍모를 풍기기도 해서였던지 그는 단박에 국민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그의 적나라한 표정과 몸짓이 노인들의 기호와 향수를 자극했기 때문이었을까 사건은 그리하여 훗날 ‘기호지세騎虎..

내가 읽은 시 2023.04.26

딱새 놀다 가는 - 김용만

딱새 놀다 가는 김용만 야트막한 야산이 하나 있음 좋겠다 약간 경사가 져도 좋겠다 듬성듬성 돌이 박힌 양지면 더욱 좋겠다 흙과 돌멩이 모으고 가려 쌓으며 힘써 개간하고 싶다 따그락따그락 호미 끝을 세워 서늘히 땀에 젖고 싶다 가르마 같은 밭고랑을 타 딱새 놀다가는 빈 밭이어도 좋을 돌이랑 흙이랑 한나절 놀고 싶다 산그늘 따라 신발 털고 돌아와 긴 겨울밤 무심히 단잠에 빠지고 싶다 ―《공정한시인의사회》 2023년 4월호

내가 읽은 시 2023.04.26

제비들, 분지의 하늘을 날다 - 유가형

제비들, 분지의 하늘을 날다 유가형 3호선은 시민의 발에 꼭 맞는 꽃물들인 신발 그 신발 속으로 날아든 일곱 색의 물 찬 제비 지지베베지지베베 쉴새 없이 지지베베 이집트 투탕카맨 파라오의 머리 위에 올라앉았다가 휙 프랑스 에펠탑으로 또 페루의 마츄픽츄로 날아갔다가 빙그르르 돌아와 제 자리에 앉는다 복숭아빛 탱탱한 볼에서 패파민트 향기가 난다 앞머리는 몇 가닥은 분홍빛 찍찍이로 돌돌 말아 올리고 쫑긋 남색 깃을 세우고 어디로 몰려가는 갈까? 책가방은 어디 두고 홀가분하게 날아다니는지 눈과 귀를 간지럽히는 암놈 일곱 마리 깃을 까닥까닥 흠~~~ 이 파란 풋내들 좀 봐라 여기는 청라역입니다 라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훅~문이 열리자마자 밖으로 내달리는 제비들 저희가 가진 젊음이 얼마나 귀하고 대단한 건지 알기는 ..

내가 읽은 시 2023.04.20

파란 코끼리 - 강보원

파란 코끼리 강보원 그는 걸었다. 그는 방금 국민은행을 지나쳤고, 국민은행을 지나 이바돔감자탕을 지나 지하로 통하는 술집을 지나 족발보쌈집을 지나 걸었다. 그는 걸었는데, 건물 2층 코인노래방을 지났고 스시정을 지나 배스킨라벤스를 지나 던킨도너츠를 지나 하나은행을 지났고 기업은행을 지나 걸었다. 그러니까 그는 꽤 번화한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는 계속 걸었다. 소울키친을 지나 커피빈을 지나 카페B를 지나 그 긴 코로 눈을 비비고 있는 파란 코끼리를 지나 주민 센터를 지나 무아국수……가 보이는 곳에서 그는 멈췄다. 긴 코로 눈을 비비고 있는 파란 코끼리? 그는 무아국수에서 등을 돌려 주민 센터를 지나 다시 코로 눈을 비비고 있는 파란 코끼리에게로 돌아왔다. 그 파란 코끼리는 분명 카페B와 주민 센터 사이에..

내가 읽은 시 2023.04.19

청산도행靑山島行

아내가 K산악회(여행사)에 청산도를 예약해 두었다고 해서 어제는 당일치기로 청산도에 다녀왔다. 새벽 6시까지 범어동의 리무진 버스 출발점으로 가야 했는데, 조금 일찍 집앞 큰 도로에 나가서 택시를 잡으려고 했지만 이날따라 택시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 동안 길에서 안절부절못하다가 구세주처럼 나타난 택시가 있어서 우리는 겨우 여행사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지리산휴게소에서 여행사가 준비한 우거지국과 쌀밥으로 아침을 먹었다. 버스는 4시간 30분을 달려 완도여객선터미널에 도착하였고, 11시 10분에 출발한 배는 50분만에 청산도에 도착하였다. 주말이라서 배도 섬도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청산도는 전라남도 완도군 청산면에 속하는데, 섬 그 자체로 한 개의 행정단위인 면面이 되어 있다. 나의 고향인 옛 달성군 공산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