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시 92

이병률의 「어떤 그림」 평설 - 박남희

어떤 그림 이병률 미술관 두 사람은 각자 이 방과 저 방을 저 방과 이 방을 지키는 일을 했다 두 사람의 거리는 좁혀졌다 사람들에게 그림은 만지지 못하게 하면서 자신들은 서로를 바라보다 만지고 쓰다듬는 일이 중요하단 걸 알았다 두 사람은 각자 담당하는 공간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두 사람만의 합의 하에 새로 정한 임무처럼 항상 방을 나란히 옮겨다녔다 그림이 그 두 사람을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그림 안에 넣겠다고 그림이 두 사람을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스스로 무수한 공간을 설정하면서 그 속에서 안정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공간은 경계를 낳고, 경계는 인간의 본성에 숨어있는 배타성을 발현한다. 그런데 인간의 배타성을 사회..

해설시 2024.02.12

김상옥의 「어느 날」 감상 - 최형심, 나민애

어느 날 김상옥(1920~2004) 구두를 새로 지어 딸에게 신겨주고 저만치 가는 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 생애 사무치던 일도 저리 쉽게 가것네 ------------------------------------------- 결과만 놓고 본다면 모든 삶은 다 비극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위대한 인간의 삶도 종국에는 죽음으로 끝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일도 생각해보면 비슷합니다. 아무리 예뻐하고 애지중지 키워도 언젠가는 제 짝을 찾아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우리 곁을 떠나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도 아이 키우는 일도 끝을 생각하면 한없이 허무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삶도 육아도 결과가 아닌 과정이 핵심이자 전부라는 것을요. 그래서 소멸할 것을, 떠날 ..

해설시 2024.02.03

[자작시 해설] 여행 - 김선영

여행 김선영 대가가 되어 고개 숙인 벼 겸손히 허리를 구부리고 들여다보아야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돌팔매로 떨어져 가는 참새 한 마리 그것에 맞는 것은 아무도 없다 시간과 나란히 기차는 달리고 그리운 것들은 먼 들판 가물거리는 산 그림자만큼 두어야 한다 속기여 이름 모르는 먼 들녘 산에 살아 처사가 되어라 난해한 시여 가을 하늘은 넓어서 아아 거기엔 산이 없어 흘러가면 만날 것이다 거기엔 거기엔 국경이 없어 신분증 없어도 만날 것이다 자동차 없이 가도 만날 것이다 맨발 깨끗이 닦아 신고 가 파아란 공기에 발자국 찍으면 릴케와 윤동주 이웃집에 살지 지구는 누렇게 익어 가고 그때 기차를 내리자 ―시집 『그리움의 식물성』 2010 ----------------------------------------- 여..

해설시 2024.01.24

떠난 사람 - 함기석

떠난 사람 함기석 밤물결 타고 멀리 떠난 사람 있어 당신 옷 다 태우니, 잠결마다 노 젓는 소리 먼 후생의 하류로 흘러드는 외딴 배, 외딴 묘에 바늘 빗소리 당신 떠나고 텅 빈 밤하늘은 돼지고기 세 근 도려낸 생살 부위 같은데 난 이제 믿지 않을 테다 헐벗은 사랑 따위 처서 눈썹이 휠 무렵 밤물결 타고 가슴속 오래 가라앉는 사람 있어 밤새 뒤척이다 귀 열면 새벽하늘 저 높은 곳에도 밥물 끓는 소리 —《포엠포엠》2023년 가을호 ------------------------------------------- 눈물겹게 작별하는 사람이 있다. 함기석의「떠난 사람」은 이별이 아니라 작별의 마음을 대면하게 한다. 시인에게 작별인사를 나누어야 할 대상은 ‘어머니’인 듯하다. 위 시에는 “먼 후생의 하류로 흘러드는” ..

해설시 2023.12.07

권박의 「폭우」 감상 - 최형심

폭우 권박 뼈가 쏟아진다. 전생의 일이다. 왜 뼈가 지금도 쏟아지는가. 왜 나는 아직도 맞고 있는가. ------------------------------------ 권박 시인이 페미니즘 시를 쓰는 작가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이 작품의 행간에서 가정폭력에 대한 뉘앙스를 읽어 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행 “왜 나는 아직도 맞고 있는가.”라는 문장과 마주하자 폭우와 가정폭력이 많은 면에서 유사하다는 걸 문득 깨닫게 되었습니다. 매 맞는 사람은 항상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의 얼굴이 어두워지지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마치 우리가 먹구름이 끼지는 않는지 하늘을 살피는 것처럼 말입니다. 때로 폭력은 천둥이나 번개처럼 한 번에 폭발적인 에너지를 분출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 피해자는 빗발치듯 쏟아지는 폭력을 맨..

해설시 2023.11.20

김종해의 「항해일지·1」 - 서범석

항해일지·1 김종해 을지로에서 노를 젓다가 잠시 멈추다. 사라져 가는 것, 떨어져 가는 것, 시들어 가는 것들의 흘러내림 그것들의 부음訃音 위에 떠서 노질을 하다. 아아, 부질없구나 그물을 던지고 낚시질하여 날것을 익혀 먹는 일 오늘은 갑판위에 나와 크게 느끼다. 오늘 하루 집어등集魚燈을 끄고 남몰래 눈물짓다. 손이 부르트도록 날마다 을지로에서 노를 젓고 저음이여 수부水夫의 청춘을 다 바쳐 찾고자 하는 것 삭풍 아래 떨면서 잠시 청계천 쪽에 정박하다. 헛되고 헛되도다, 무인도여 한 잔의 술잔 속에서도 얼비치는 저 무인도를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다. 그러나 눈보라 날리는 엄동嚴冬 속에서도 나의 배는 가야 한다. 눈을 감고서도 선명히 떠오르는 저 별빛을 향하여 나는 노질을 계속해야 한다. ―『시현실』, 202..

해설시 2023.11.14

릴케, 「두이노의 비가」 중 제2비가 평설 - 신형철

「두이노의 비가」 중 제2비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중략) 연인들이여, 어울려 만족하는 그대들이여, 너희들에게 묻는다, 우리의 존재를. 너희들은 손을 꼭 잡는다. 그것으로 증명하는 것인가? 그렇다, 내 자신의 두 손도 서로를 느끼고, 혹은 그 두 손 안에 지친 얼굴을 묻고 쉬는 일도 있다. 그것이 얼마간은 나 스스로를 감지하게도 한다. 허나 누가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가? 그러나 연인들이여, 서로가 상대의 환희 속에서 성장하는 너희들. 끝내는 압도되는 상대가 , 하고 애원하는 너희들 ─ 서로의 애무 속에서 풍년 든 포도처럼 풍요하게 영그는 너희들. 다만 상대가 완전한 우위를 차지하는 것만으로도 가끔은 소멸하는 너희들. 너희에게 묻는다, 우리들 인간의 존재를. 나는 알고 있다, 너희들이 그..

해설시 2023.11.05

김시습의 「나는 누구인가自寫眞贊」 평설 - 신형철

나는 누구인가 —자화상에 부쳐自寫眞贊 김시습 이하李賀를 내려다볼 만큼 俯視李賀 부시이하 조선 최고라 했지. 優於海東 우어해동 드높은 명성과 헛된 기림 騰名謾譽 등명만예 어찌 네게 걸맞을까? 於爾孰逢 어이숙봉 네 몸은 지극히 작고 爾形至眇 이형지묘 네 말은 지극히 어리석네. 爾言大侗 이언대동 네가 죽어 버려질 곳은 宜爾置之 의이치지 저 개굴창이리라. 丘壑之中 구학지중 — 정길수 편역 『길 위의 노래』 (돌베개,2006) ----------------------------------------------- 10대 시절 읽은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는 당시 유행했던 영화 〈천녀유혼〉 같은 홍콩산産 귀신 로맨스에 비하면 시시하게 느껴졌다. 배필 없음을 탄식하던 양생이라는 청년이 부처님과 저포윷 놀이를 하여 이긴..

해설시 2023.10.24

신동엽의 「산문시 1」 평설 - 신형철

산문시 1 신동엽 스칸디나비아라던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러셀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소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갯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트럭을 두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

해설시 2023.10.23

황지우의 「나는 너다 44」 평설 - 신형철

나는 너다 44 황지우 1980년 5월 30일 오후 2시. 나는 청량리 지하철 플랫폼에서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을 보았다. 그 문에 이르는 가파른 계단에서 사람들은 나를 힐끗힐끗 쳐다만 보았다. 가련한지고, 서울이여. 너희가 바라보는 동안 너희는 돌이 되고 있다. 화강암으로 빚은 위성도시衛星都市여, 바람으로 되리라. 너희가 보고만 있는 동안, 주주의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웁시다. 최후의 일인까지! 내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내 소리를 못 듣느냐? 아, 갔구나, 갔어. 석고로 된 너희 심장을 내 꺼내리라. 나에게 대들어라. 이 쇠사슬로 골통을 패주리라. 왜 내가 너희의 임종을 지켜야 하는지! 잘 가라, 잘 가라. 문이 닫히고 나는 칼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로 갔다. 파란 유황불의 화환花環 속에서 나는..

해설시 2023.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