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시 96

황동규의 「조그만 사랑 노래」 해설 - 최영미, 나민애

조그만 사랑 노래 황동규(1938~ )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 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가득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의 눈. ------------------------- ‘어제를 동여맨 편지’라니 참 멋진 표현이다. 길이 사라지면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기 마련이나, 뒤가 반복되며 서로를 부정하는 행이 시적 긴장감을 높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다. 공기놀이를 하도 해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였는데, 내가 갖고 놀던 돌은 다 어디..

해설시 2023.01.19

장옥관의 「없는 사람 」 해설 - 소유정

없는 사람 장옥관 오피스텔 문을 따고 들어가니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없는 게 아니라 꽉 채우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과 거실을 메우고 복도와 엘리베이터와 이웃집 문틈으로 스며든 이유가 외로움 때문이라고 예단해선 안 된다 단지 그는 갑갑했을 뿐이다 갑갑함이 저 스스로 몸 부풀려 이웃 집 현관문을 노크한 것일 게다 경계를 벗어나 공기를 장악한 그는 원래부터 바람이었다 오십이 넘도록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다니며 공간을 확장하고 저를 부풀렸다 미처 따라가지 못한 뼈는 화장실 문턱에 가지런히 누워 스멀스멀 구더기를 불러 들였다 날개를 달아주기 위해서였다 견디다 못해 이웃들이 문 따고 들어가니 낡은 소파 밑에서 그가 키우던 포메라니안이 꼬리 흔들며 기어 나왔다고 한다 도대체 무얼 먹었는지 통통하게 살이 오른 개는..

해설시 2023.01.12

자작시 해설 「쇠소깍, 남쪽」- 강영은

쇠소깍, 남쪽 강영은 소가 드러누운 것처럼 각이 뚜렷한 너를 바라보는 내 얼굴의 남쪽은 날마다 흔들린다 창을 열면 그리운 남쪽, 살청빛 물결을 건너는 것을 남쪽의 남쪽이라 부른다면 네 발목에 주저앉아 무서워,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무서움보다 깊은 색, 살이 녹아내린 남쪽은 건널 수 없다 눈이 내리면 너도 두 손을 가리고 울겠지 눈 내리는 날의 너를 생각하다가 북쪽도 남쪽도 아닌 가슴팍에 글썽이는 눈을 묻은 젊은 남자의 비애를 떠올린다 흑해의 지류 같은 여자를 건너는 것은 신분이 다른 북쪽의 일, 구실잣밤나무 발목 아래 고인 너는 따뜻해서 용천수가 솟아나온 너는 더 따뜻해서 비루한 아랫도리, 아랫도리로만 흐르는 물의 노래, 흘러간 노래로 반짝이는 물의 살결을 무어라 불러야 하나 아직도 검푸른 혈흔이 남아 ..

해설시 2022.12.01

유병록의 「딛고」 감상 - 나민애

딛고 유병록(1982~ ) 선한 이여 나에게 바닥을 딛고 일어서라 말하지 마세요 어떻게 딛고 일어설 수 있을까 네가 활보하다가 잠들던 땅을, 나를 기다리던 땅을 두 팔에 힘을 잔뜩 주고서 구부러진 무릎을 펼쳐서 어떻게 너를 딛고 일어설 수 있을까 여기는 이미 깊은 수렁인데 선한 이여 손 내밀어 나를 부축하지 마세요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여기에 너의 웃음과 울음을 두고서 나를 부르던 목소리와 너의 온기를 두고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모두 묻어두고서 떠날 수 있을까 여기는 이미 나에게도 무덤인데 ------------------------- 16세기의 허난설헌은 두 아이를 잃고 나서 ‘곡자(哭子)’라는 시를 썼다. 어린 자식을 잃은 심정이 어찌나 서럽던지 시인은 피눈물로 울음소리 삼킨다고 표현했다. 그..

해설시 2022.11.06

이윤설의 「재에서 재로」 감상 - 신미나

재에서 재로 이윤설(1969~2020) 꿈에 당신이 찾아온 어제는 둘이 서먹하니 마루에 앉아 있습니다 빈 쟁반의 보름달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당신이 내 옆에 가까이 있어 본 지도 하도 오래되었는데, 내가 부른 것도 아닌데 나는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늘엔 미워 불러볼 이름 하나 없이 맑고 잡초 자란 마당가에 우리 둘이 소복하니 무덤처럼 앉아 말없이 백 년 동안 한 얘길 하고 또 하며 당신이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지러지는 달의 얼굴이 소금처럼 소슬하고 짠 빛으로 와서 우리의 식은 재를 만져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가벼이 고운 가루인 줄 몰랐을 때도 있었습니다 조용히 산이 마루로 다가와 당신을 보자기에 싸듯 덮어 달쪽으로 데려가도록 나는 꿈에도 오지 않을 것을 알았습니다 용서가 그런 ..

해설시 2022.11.03

[고두현의 아침 시편] ‘빠삐용’ 실존 인물, 탈출한 뒤 ‘대박’

[고두현의 아침 시편] ‘빠삐용’ 실존 인물, 탈출한 뒤 ‘대박’ 드레퓌스의 벤치에서 ―도형수(徒刑囚) 짱의 독백(獨白) 구 상 (1919~2004) 빠삐용! 이제 밤바다는 설레는 어둠뿐이지만 코코야자 자루에 실려 멀어져 간 자네 모습이야 내가 죽어 저승에 간들 어찌 잊혀질 건가! 빠삐용! 내가 자네와 함께 떠나지 않은 것은 그까짓 간수들에게 발각되어 치도고니를 당한다거나, 상어나 돌고래들에게 먹혀 바다귀신이 된다거나, 아니면 아홉 번째인 자네의 탈주가 또 실패하여 함께 되옭혀 올 것을 겁내고 무서워해서가 결코 아닐세. 빠삐용! 내가 자네를 떠나보내기 전에 이 말만은 차마 못했네만 가령 우리가 함께 무사히 대륙에 닿아 자네가 그리 그리던 자유를 주고, 반가이 맞아 주는 복지(福地)가 있다손, 나는 우리에..

해설시 2022.10.07

박제천「월명」해설 - 김재홍

月明 박제천(1945~) 한 그루 나무의 수백 가지에 매달린 수만의 나뭇잎들이 모두 나무를 떠나간다. 수만의 나뭇잎들이 떠나가는 그 길을 나도 한 줄기 바람으로 따라 나선다. 때에 절은 살의 무게 허욕에 부풀은 마음의 무게로 뒤처져서 허둥거린다. 앞장서던 나뭇잎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쩌다 웅덩이에 처박힌 나뭇잎 하나 달을 싣고 있다. 에라 어차피 놓친 길 잡초더미도 기웃거리고 슬그머니 웅덩이도 흔들어 놀 밖에 죽음 또한 별것인가 서로 가는 길을 모를 밖에 「월명」은 고승 월명사와 그의 시 「제망매가」를 소재로 하여 삶의 덧없음을 노래하고 있다. 「제망매가」의 중심 이미지인 길·바람·나뭇잎은 그대로 「월명」의 시상을 이루고 있으며, 주제인 죽음과 삶의 문제도 직접적인 연관성을 지닌다. 먼저 첫번째 비유인..

해설시 2022.09.13

최서림의 「정저지와井底之蛙」 감상 - 서대선

정저지와(井底之蛙) 최서림 하늘을 날아다니며 노니는 신인神人보다 우물 안 개구리로 살고 싶다. 열심히 돈 벌어 마누라한테 갖다 바치고 다 큰 자식들 눈치나 보고 살고 싶다. 무한경쟁 속에서 로또나 꿈꾸며 살고 싶다. 바람보다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진인眞人보다 땅바닥을 박박 기면서 살고 싶다. 솔잎에 이슬을 받아먹고 사는 지인至人보다 햄버거로 점심을 때우는 샐러리맨으로 살고 싶다. 변기 뚫는 관통기 사러 철물점 찾아다니다가 빈 깡통 걷어차며 화풀이나 하며 살고 싶다. 팔목 부러진 아내 대신에 설거지나 하며 살고 싶다. 아내랑 옥신각신하는 가운데 어느덧, 우물 안에도 별빛이 비친다. 나에게도 드디어 작은 평화와 가벼운 자유가 빗물처럼 내린다. ------------- 새벽 5시 현관문을 연다. 현관 앞에서 두..

해설시 2022.09.05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유계영 〈에그〉

장석주의 시와 시인을 찾아서 - 유계영 〈에그〉 글 : 장석주 시인, 문학평론가 에그 깃발보다 가볍게 펄럭이는 깃발의 그림자 깃에 기대어 죽는 바람의 명장면 새는 뜻하지 않게 키우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은 알아서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창밖의 무례한 아침처럼 그러니까 다가올 키스처럼 어떻게 두어도 자연스럽지 않은 혀의 위치처럼 새는 뜻하지 않게 시작된 것이다 새가 머무는 날 홀쭉한 빛줄기에 매달리는 어둠을 쪼며 짧게 나누어 자는 잠 그런 잠은 싫었던 거야 삼백육십오 일 유려한 발목의 처녀처럼 하나의 목숨으론 모자라 죽음은 탄생보다 부드러운 과정 새는 알을 남기고 간 것이다 나는 알을 처음 본 게 아니지만 곧 태어날 새는 어미를 전혀 알지 못한다 알 속의 혀가 입술의 위치를 짚어 보는 그런 명장면 ― 유계..

해설시 2022.09.02

유계영, 「온갖 것들의 낮」 평설 - 오형엽

온갖 것들의 낮 유계영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요 하나의 의문으로 빨강에서 검정까지 경사면에서 묘지까지 항문에서 시작해 입술까지 공원이라 불렀다 바람이 불자 화분이 넘어졌다 화분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고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어제 탔던 남자를 오늘도 탔다 내가 누구인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어제 먹어치운 빵을 태양이 등에 업고 나는 태양을 등에 업고 너는 나를 등에 업고 비둘기가 아주 잠깐 날아올랐지만 층층이 흔들렸다 공원의 한낮이 우르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날씨에 대한 이야기만을 나누며 집으로 돌아갔다 —시집『온갖 것들의 낮』 2015 ---------------------------- 유계영은 시의 제목을 1차적으로 본문의 다양한 세부 중에서 하나를 취사선택하여 제시함으로써 편파적이고 즉흥적인 속..

해설시 2022.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