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김선영
대가가 되어 고개 숙인 벼
겸손히 허리를 구부리고 들여다보아야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돌팔매로 떨어져 가는 참새 한 마리
그것에 맞는 것은 아무도 없다
시간과 나란히 기차는 달리고
그리운 것들은 먼 들판
가물거리는 산 그림자만큼 두어야 한다
속기여 이름 모르는 먼 들녘
산에 살아 처사가 되어라
난해한 시여
가을 하늘은 넓어서
아아 거기엔 산이 없어
흘러가면 만날 것이다
거기엔 거기엔 국경이 없어
신분증 없어도 만날 것이다
자동차 없이 가도 만날 것이다
맨발 깨끗이 닦아 신고 가
파아란 공기에 발자국 찍으면 릴케와 윤동주
이웃집에 살지
지구는 누렇게 익어 가고
그때 기차를 내리자
―시집 『그리움의 식물성』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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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할 때의 우리들은 겸허해진다. 기차의 창밖으로 펼쳐진 논밭을 바라보며 금빛으로 물결치는 평야를 달릴 때 수난의 여름 기후를 거쳐 가을의 풍요에 다다른 벼를 보게 된다. 곡식 중의 곡식인 벼가 영원히 그 빛깔이 불변하는 항금빛이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게도 하고 금빛 이삭을 탐하는 참새들의 짓에서 무위의 허실을 느끼게도 될 것이다. 공들인 금이삭과 염치없이 날아오는, 돌멩이같이 떨어지는 참새 한 마리의 대비를 인간적 시각으로 판단할 때는 비판의 대상이 되지만 신적인 입장으로 내려다볼 때는 자연스러운 당연함이 될 것이다.
기차를 타고 한없이 달리고 싶은 마음은 생을 오래오래 살고 싶은 인간의 염원의 부분적 표현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행의 여로는 끝이 있고 내려야 할 종점이 있는 법이다. 인간의 목숨에도 한계가 있으며 시간의 창고에서 자신이 써야 할 시간의 재고가 저울에 담겨 있을 것이다.
인생의 종착역을 내린 뒤 우리는 또한 여행을 하게 되리라. 새로운 여행자들과 동행이 되어 비로소 그립던 사람들과 해후하리라. 그때에는 주민등록증을 소지하지 않아도 되고 자동차나 기차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리라.
자아, 그러면 어디에서 정착해 살까.
나는 거기서도 시를 쓰는 시인이 되고 싶다. 릴케와 슬프고 아름다운 윤동주, 난해한 시인 말라르메와 울타리 없는 집에서 살 것이다.
아아 가을엔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싶다.
—《문예바다》 2023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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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 / 1938년 개성 출생. 196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달을 배웅하며』 『작파하다』 외 다수. 시선집 『달을 빚는 남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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