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시 96

릴케, 「두이노의 비가」 중 제2비가 평설 - 신형철

「두이노의 비가」 중 제2비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중략) 연인들이여, 어울려 만족하는 그대들이여, 너희들에게 묻는다, 우리의 존재를. 너희들은 손을 꼭 잡는다. 그것으로 증명하는 것인가? 그렇다, 내 자신의 두 손도 서로를 느끼고, 혹은 그 두 손 안에 지친 얼굴을 묻고 쉬는 일도 있다. 그것이 얼마간은 나 스스로를 감지하게도 한다. 허나 누가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가? 그러나 연인들이여, 서로가 상대의 환희 속에서 성장하는 너희들. 끝내는 압도되는 상대가 , 하고 애원하는 너희들 ─ 서로의 애무 속에서 풍년 든 포도처럼 풍요하게 영그는 너희들. 다만 상대가 완전한 우위를 차지하는 것만으로도 가끔은 소멸하는 너희들. 너희에게 묻는다, 우리들 인간의 존재를. 나는 알고 있다, 너희들이 그..

해설시 2023.11.05

김시습의 「나는 누구인가自寫眞贊」 평설 - 신형철

나는 누구인가 —자화상에 부쳐自寫眞贊 김시습 이하李賀를 내려다볼 만큼 俯視李賀 부시이하 조선 최고라 했지. 優於海東 우어해동 드높은 명성과 헛된 기림 騰名謾譽 등명만예 어찌 네게 걸맞을까? 於爾孰逢 어이숙봉 네 몸은 지극히 작고 爾形至眇 이형지묘 네 말은 지극히 어리석네. 爾言大侗 이언대동 네가 죽어 버려질 곳은 宜爾置之 의이치지 저 개굴창이리라. 丘壑之中 구학지중 — 정길수 편역 『길 위의 노래』 (돌베개,2006) ----------------------------------------------- 10대 시절 읽은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는 당시 유행했던 영화 〈천녀유혼〉 같은 홍콩산産 귀신 로맨스에 비하면 시시하게 느껴졌다. 배필 없음을 탄식하던 양생이라는 청년이 부처님과 저포윷 놀이를 하여 이긴..

해설시 2023.10.24

신동엽의 「산문시 1」 평설 - 신형철

산문시 1 신동엽 스칸디나비아라던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러셀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소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갯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트럭을 두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

해설시 2023.10.23

황지우의 「나는 너다 44」 평설 - 신형철

나는 너다 44 황지우 1980년 5월 30일 오후 2시. 나는 청량리 지하철 플랫폼에서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을 보았다. 그 문에 이르는 가파른 계단에서 사람들은 나를 힐끗힐끗 쳐다만 보았다. 가련한지고, 서울이여. 너희가 바라보는 동안 너희는 돌이 되고 있다. 화강암으로 빚은 위성도시衛星都市여, 바람으로 되리라. 너희가 보고만 있는 동안, 주주의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웁시다. 최후의 일인까지! 내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내 소리를 못 듣느냐? 아, 갔구나, 갔어. 석고로 된 너희 심장을 내 꺼내리라. 나에게 대들어라. 이 쇠사슬로 골통을 패주리라. 왜 내가 너희의 임종을 지켜야 하는지! 잘 가라, 잘 가라. 문이 닫히고 나는 칼이 쏟아지는 하늘 아래로 갔다. 파란 유황불의 화환花環 속에서 나는..

해설시 2023.10.17

이영광의 「사랑의 발명」 평설 - 신형철

사랑의 발명 이영광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나무는 간다』(2013) ------------------------------------------ “사랑은 재발명되어야 한다.” 많은 이들이 랭보의 이 구절을 인용할 때 이 문장이 포함돼 있는 다음 대목 전체에 찬성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난 여자들을 사랑하지 않아. 모두 알다시피 사랑은 재발명되어야 해. 여자들은 안전한 자리를 바랄 수밖에 없어. 일단 그것을 얻고 나면 마음이니 아름다움이니 하는 것은 내..

해설시 2023.10.13

김수영의 「봄밤」 평설 - 신형철

봄밤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業績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行路와 비슷한 回轉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人生이여 災殃과 不幸과 격투와 청춘과 千萬人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節制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靈感이여 —합동시집 『平和에의 證言』 (1957) --------------------..

해설시 2023.10.10

신용목의 「갈대 등본」 평설 - 함기석

갈대 등본 신용목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깊은 날은 갔다 모든 謀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 신용목은 바람과 햇살 사이를 떠도는 서정 시인이다. 그의 시는 풍경의 감각적 ..

해설시 2023.09.03

임승유의 「그녀는 거의 자기집에 있는 것 같았다」 감상 - 고광식

그녀는 거의 자기집에 있는 것 같았다 임승유 어디에 있었어 부엌 책상 위 하얀색 바구니에 그 바구니라면 내가 어제 비누칠까지 해가며 씻은 후에 오후 햇볕에 말려서 올려 놓은 것 그 전에는 베란다 한 구석에서 겨울을 났지 그 전에는 서로 다른 세 가지 색깔의 꽃을 피워내던 화초가 심겨 있었고 그 전에는 요즘엔 안 쓰는 그린 초크가 가득 담겨 있어서 내가 쏟아낸 것 더 전에는 내가 모르는 것 모르겠어 그게 어쩌다 거기 들어가 있었는지 ―《아토포스Atopos》 2023 여름호 ................................................ 시적 화자가 “어디에 있었어” 묻는다. 장소성을 묻는 이 물음은 구체적이고 독특한 곳을 지칭한다. 네가 있었던 그곳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장소..

해설시 2023.08.29

이수명의 「체조하는 사람」 해설 - 송승환

체조하는 사람 이수명 나에게 체조가 있다. 나를 외우는 체조가 있다. 나는 체조와 와야만 한다. 땅을 파고 체조가 서 있다. 마른 풀을 헤치고 다른 풀을 따라 웃는다. 사투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대기의 층과 층 사이에 체조가 서 있다. 나는 체조를 따라 자꾸 미끄러지는 것일까 나는 체조를 떠나지 않고 나는 구령이 터져 나온다. 체조는 심심하다. 체조가 나에게 휘어져 들어올 때 나는 체조를 이긴다. 체조는 나를 이긴다. 아래층과 위층이 동시에 떨어져 나간다. 나는 참 시끄럽다. 내가 체조를 감추든가 체조가 나를 감추든가 해야 했다. 그렇게 한 번에 화석화된 광학이 있다. 거기, 체조하는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체조는 나에게 없는 대기를 가리켜 보인다. 무너지느라고 체조가 서 있다. ―시집 『마치』..

해설시 2023.07.31

여세실의 「이제와 미래」 감상 - 양경언

이제와 미래 여세실 분갈이를 할 때는 사랑할 때와 마찬가지로 힘을 빼야 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장마였다 올리브나무가 죽어가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잡아두는 것에는 재능이 없고 외우던 단어를 자꾸만 잊어버렸다 잎이 붉게 타들어간 올리브나무는 방을 정화하는 중이라고 했다 흙에 손가락을 넣어보면 여전히 축축한, 죽어가면서도 사람을 살리고 있는 나무를 나는 이제라고 불러본다 흙을 털어낸다 뿌리가 썩지 않았다면 다시 자랄 수 있을 거라고 이제야, 햇볕이 든다 생생해지며 미래가 되어가는 우리는 타고나길 농담과 습기를 싫어하고 그 사실을 잊어보려 하지만 이미 건넜다 온 적 있지 뿌리를 넘어 줄기를 휘감아 아주 날아본 적 양지를 찾아다녔다 산에서 자라는 나무의 모종 하나를 화분에 옮겨 심으면 야산의 어둠이 방 안에 ..

해설시 2023.0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