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일기 124

포도

포도에 대해서라면 할 이야기가 참 많다. 계단식 논에 벼농사를 지으시던 부모님이 그 논에 포도나무(캠벨어리)를 심으신 건 1980년대 초반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60대로 접어드는 연세였고 나는 20대 후반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휴일이 오면 나와 아내는 부모님을 도왔고, 포도나무에 농약을 치거나 수확한 포도를 공판장에 싣고 가는 건 내가 도맡은 일이었다. 20여년 짓던 포도농사를 그만두게 된 것은 2000년대 초반이었다. 자급자족에 그치던 벼농사에 비하여 포도는 돈을 만지게 해 주었으나 세월이 지나도 포도값은 제자리걸음이었고, 게다가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무역협정인 한-칠레 FTA가 체결되어 포도값이 폭락할 우려가 생기자 정부에서 약간의 보조금을 주어 포도 농가의 폐업을 독려했던 것이다. 중장비를 동원..

텃밭 일기 2019.06.29

장마가 왔다

기다리던 장마가 왔다. 먼 남쪽 바다에 머물러 있던 장마전선이 북상하여 드디어 낮부터 많은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사흘이 멀다하고 텃밭에 물을 주느라 힘들었는데,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되겠다. 가뭄에 잎이 비틀어져 있던 고추, 토마토, 가지, 상추, 부추, 양배추, 들깨, 울콩, 생강, 호박… 어느 것 할 것 없이 모두가 좋아할 것이다.물소리가 들리지 않던 개울에도 물이 다시 요란하게 흘러갈 것이다. 그 속에 살던 생명들도 다시 제 세상을 만난 듯 활력을 되찾을 것이다. 내가 자주 가는 단산지를 포함한 우리 나라의 모든 호수에 물이 가득 찼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것은 정치적 의도가 전혀 섞이지 않은 얘기인데, 이번 장마땐 비가 많이 와서 저 썩어가는 4대강의 닫혀있는 수문들도 활짝 좀 열렸으면 좋겠..

텃밭 일기 2019.06.26

반가운 미루나무

요즘은 운동 삼아 부근의 단산지 둘레길을 자주 걷곤 한다. 단산지는 하늘에서 보면 큰 손바닥처럼 생겼고, 손가락 같은 대여섯 개의 만(灣)을 따라 들쭉날쭉한 길은 3.5km나 되어서 한 바퀴 돌면서 산책하기에 적당하다. 좀더 오르내림이 가파른 길을 걷고 싶으면 3.7km의 가운뎃길도 있고, 구절송 전망대까지 연결되는 7km의 멀고 높은 바깥길도 있다. 물에서 가까운 그 둘레길을 걷다가 얼마 전에는 길가에 서 있는 미루나무 몇 그루를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계곡쪽으로 만(灣)이 깊숙이 들어온 곳의 어두컴컴한 길가에 참나무와 아카시아, 버드나무, 소나무 등과 함께 서 있어서 그동안은 모르고 지나다녔었다. 천천히 둘레길을 걸으며 찾아보니 아름드리 고목이 일곱 그루나 되었는데, 이 나무가 워낙 물러서 수명이 길..

텃밭 일기 2019.06.20

양귀비에 대한 기억

수많은 꽃에 대한 기억 중에 아주 오래되었지만 뚜렷한 한 무리의 기억들이 있다. 내가 대여섯 살 때 뒤안에 한두 송이 피다가 잊혀져 간 붉은 꽃. 그 꽃에서 여문 씨앗 대궁이(대) 하나가 초가 지붕 밑 큰방 장농 서랍에서 먼지와 함께 여러 해 동안 묵혀져 있던 기억. 그리고 배탈이 날 때마다 엄마가 눈종지기(작은 종지)에 까맣게 말라붙은 조청을 숟가락총으로 쬐끔 떼어 물에 녹여 주셨는데, 쌉쌀한 그걸 마시면 감쪽같이 복통이 나았었던 기억. 그 꽃에 대한 기억은 그것이 다다. 조청은 뒤안에 피던 그 붉은 꽃의 대궁이를 고아서 만든 것이었다는 것도 꽃의 이름도 내가 좀더 자란 뒤 엄마한테 들어서 알게 되었다. 양귀비, 아편꽃이라고. 수년 전(2014. 4.) 두 친구와 함께 중국 서안(西安)에 배낭여행을 갔..

텃밭 일기 2019.06.13

노무현 대통령 10주기

봉하마을에 문상 가던 때가 어제 같은데, 오늘이 벌써 노무현 대통령의 10주기란다. 유신시대와 신군부 시대를 살아온 세대인 나로선 우리 나라 대통령으로서 노무현을 만난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는 그전에 신동엽 시인의 '산문시1'이라는 시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바로 이 시의 정신에 부합하는 대통령을 드디어 우리 시대에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에, 마음의 지지를 많이 보냈었다. 힘없는 노동자 편에 늘 서 주었던 인권 변호사, 원칙을 중히 여기고 지역주의를 깨뜨리며 국민통합을 위해 노력했던 정치인, 권위주의를 내려놓고 국가 권력을 깨어있는 시민에게 돌려주고자 한 민주주의자, 지방분권을 강화하고 민족의 자존을 끌어올리려고 애썼던 대통령,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가 따돌림 받던 비운의 지도자…… 수평적인 분..

텃밭 일기 2019.05.23

다시 텃밭에서

지난해 시월 하순에 심었던 마늘과 양파가 온화했던 겨울 탓인지 풍작이다. 오늘은 아내와 함께 마늘쫑도 좀 뽑고, 주먹 만하게 굵어진 양파도 몇 알 맛보려고 뽑았다. 그리고 예초기의 시동을 걸어 짊어지고 풀이 무성해진 다섯 그루의 복숭아 나무 밑과 밭 주변, 산소 가는 오솔길의 풀을 베었다. 지난 삼월 말부터 신변에 생긴 '경황없음'으로 인하여 그동안 텃밭에 자주 못 오다가 그 경황없음이 조금씩 숙지게 되자 최근에는 가끔 들를 수 있게 되었다. 고사리밭에서 고사리를 몇 번 꺾어 삶아 말리기도 하고, 마늘과 양파밭에 물도 주었다. 얼마 전에는 고추 모종(30포기), 토마토(10포기), 가지(5포기), 오이와 파프리카(3포기씩), 고구마 모종(1단), 양배추와 브로콜리(10포기씩)를 사다 심었고, 생강도 호기..

텃밭 일기 2019.05.22

봉무동에서

봉무동은 어릴 적에 부모님을 따라 해안장(지금의 불로5일장)이나 검단동의 외갓집에 가기 위해 털털거리는 버스를 타고 가끔 지나다니기만 하던 곳이다. 고등학교 적 하루는 단풍철에 팔공산에서 나오는 버스가 만원이라 타지 못하고, 쌀 한 말을 칡덩굴 멜빵으로 짊어진 채 불로동까지 40리 길을 걷던 지루한 들판길이었다. 가파른 산등성이에 지는 해만 보다가 들판 너머로 떨어지는 해를 볼 수 있던 먼 대처였다. 지금은 그 넓던 들판에 '이시아 폴리스'라는 신 시가지가 들어서고, 고층 아파트들이 대로의 양쪽에 즐비하다. 날씨가 추워진 지난해 11월부터 이곳 봉무동에 살게 되었는데, 옛날부터 궁금했던 이곳 언저리를 아내와 함께 기웃거리며 둘러보고 있다. 고라니가 많은 금호강 바닥길을 따라 동촌 유원지까지 걸어보기도 하..

텃밭 일기 2019.01.20

고마운 토마토

지난봄에 텃밭 한쪽 노지에 심었던 토마토와 방울토마토 몇 포기. 여름 내내 끊임없이 붉고 노란 토마토를 따먹게 해 주더니, 서리가 내려 잎이 시들어 가는 지금까지도 주렁주렁 열매를 달고 있다. 서리만 살짝 왔을 뿐 물이 얼 정도의 추위는 오지 않아서 달려 있는 토마토가 아직은 싱싱하다. 벌레들은 추워서 벌써 다 멀리 떠났는지 벌레 먹은 것도 없이 깨끗하다. 지난주에 한 소쿠리를 딴 것이 마지막이 될 줄 알았는데, 오늘도 한 소쿠리를 땄다. 하루가 다르게 햇볕이 엷어져 가고 추워져 가자 토마토 덩굴은 한 알의 열매라도 더 익히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오늘밤에 비가 조금 오고 나면 내일부터는 더욱 추워진다고 하니 토마토 줄기와 열매들도 얼고 말 것이다. 저 푸른 덩굴과 잎과 열매들이 그대로 ..

텃밭 일기 2018.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