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일기 121

춘설

지난겨울엔 눈이 거의 내리지 않았다. 가뭄이 계속 이어지다가 3월 초순에야 눈다운 눈이 한번 내렸었는데, 그땐 날씨가 푸근하여 금방 녹고 말았었다. 그런데 오늘 이 대구 지역에도 대설 예보가 있었고, 기온도 0도 전후로 낮겠다는 예보여서 눈이 많이 쌓일 것을 기대하여 나는 어제 미리 산가에 와 있었다. 새벽 세 시쯤 눈이 뜨여 창밖을 보니 눈이 제법 쌓여 있었고, 여섯 시에 일어났을 땐 온통 눈 세상이었다. 마당에 나가 철자를 꽂아 보았더니 적설량이 10cm가 넘었다. 눈이 조금 습해서 걸으면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났다. 손가락만 하게 새순이 자란 모란, 이제 막 삐죽 내미는 불두화 순, 꽃망울이 벙근 홍매와 활짝 핀 산수유 꽃 위에도 눈이 쌓였다. 지난주에 이미 마당의 한쪽에서 피어있던 할미꽃은 두꺼운..

텃밭 일기 2018.03.21

짱구가 돌아갔다

짱구는 그 동안 먹는 밥의 양과 체중을 점점 줄이더니 그저께부터는 식음을 전폐했었다. 깨워서 밥그릇 앞에 일으켜 세우면 겨우 버티고 서서 냄새만 한번 맡고는 고개를 돌려버리고, 몸을 쭈그려 힘을 주며 오줌을 조금 누곤 제 집에 들어가 쓰러져 눕기 바빴다. 어제 밤엔 자다가 신음인 듯 잠꼬대인 듯 몇 번이나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오늘 새벽 5시쯤에 먼저 일어난 아내가 짱구가 이상하다고 해서 보니 의식이 희미한 듯하고 숨도 고르지 않았다. 두 손으로 받쳐 안는데 목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이름을 부르며 머리를 쓰다듬으면 눈꺼풀과 귀만 조금 움직일 뿐이었다. 아내와 내가 몇 번이나 목멘 소리로, 편안한 곳으로 잘 가거라, 다음 세상에서 우리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자고 작별 인사를 했는데, 알아듣는 듯 몇 ..

텃밭 일기 2017.11.11

엄마가 보내 주신 풀꽃

산가에서 걸어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부모님 산소. 아버지 봉분에는 잔디가 치밀하게 잘 덮였지만, 그 옆 엄마 봉분엔 왠지 잔디가 많이 죽어서 늘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가뭄이 지속될 때는 물을 떠다가 뿌리기도 하고, 혹시 뒤쪽 소나무의 솔잎이 북풍에 날려와 봉분에 얹히고, 그 솔잎의 왁스 성분이 녹아서 잔디에 해를 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난 가을에는 장대 끝에 톱을 매달아 산소쪽으로 뻗은 가지들을 다 잘랐다. 봉분에 덮였던 마른 솔잎도 모두 갈쿠리로 걷어내었었다. 그리고 오늘은 부근의 잔디를 떠서 봉분에 부분적 이식을 했다. 일을 하다가, 엄마 봉분 앞에서 이름 모를 앙증스런 풀꽃을 한 송이 발견했다. 2cm 정도의 키에, 하나 뿐인 활짝 핀 꽃송이는 엄지 손톱 보다 조금 더 큰 크기다. ..

텃밭 일기 2017.03.24

설을 알려 주는 보세란

이 엄동설한에 난향이 그윽하다. 보세란(報歲蘭)은 설(새해)을 알려주는 난이라는 데서 붙은 이름인데, 난이 우리에게 계절을 알려주는 방법이란 다름 아닌 꽃을 제때에 피우는 것이겠다. 내가 가꾸고 있는 보세란의 일종인 이 상원황(桑原黃)은 두 포기다. 그 중 한 포기는 양력 설을 알리려고 이미 꽃을 피웠고, 다른 한 포기는 다가오는 음력 설 즈음에 피려는지 꽃망울이 맺혀 있다. 같은 뿌리에서 나눠진 난인데도 꽃피는 시기가 보름도 더 차이 나는 것이 신기하다. 3년 전(2013. 9. 27.)에 타이완에 친구들과 부부 동반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타이베이 시에 있는 가일화시(假日花市)라는, 휴일에만 서는 큰 꽃시장에 구경가서 이 난을 사 왔다. 잎에 황백색의 호가 있고 강건하고 기품이 있는 이 상원황을..

텃밭 일기 2017.01.12

울산에서 온 맥주

어제는 울산에 사는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20여일 전, 이곳 고향집 마당에서 고등학교 졸업 40주년 기념 모임을 했었는데(37명 참석), 그때 부부가 함께 와서 오랜만에 보게 되었던 친구다. 40년 전쯤에 이곳에 놀러 왔었을 때 엄마가 토끼탕을 끓여 주시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친구다. 집에서 손수 만든 맥주를 좀 보내려고 한다며 주소를 물었다. 그 맥주가 오늘 오후에 도착했다. 정성 들여 포장해 보내준 박스를 뜯어보니 막걸리 병 만한 용기에 세 병이나 들어 있었다. 뒷집 형과 나팔 연습을 하면서 맛보았는데, 맛과 향이 진하고 좋았다. 보내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지난번 미국 여행 중에 즐겨 마시던 Ale 맥주와 맛이 비슷하다고 했더니 맞단다. APA(American Pale Ale)이라는 맥..

텃밭 일기 2016.11.27

송이를 따다

운동 겸 버섯 탐색을 해 보기로 했다. 먼 산에 갈 필요까진 없고 가까운 동산으로 향했다. 올해는 수년 만에 송이 풍년이라고 하는 데다, 높은 산의 송이가 끝물이라고 이웃집 형이 말하는 것으로 볼 때, 집 가까운 야산에도 송이가 난다면 날 때가 된 것이다. 내가 어릴 적에는 뒷산에 송이가 많이 났었다. 아버지와 나무하다가 지게를 받쳐 두고 송이가 날 만한 곳으로 가보면, 잔솔밭에 수두룩이 나 있던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싸리나무를 꺾어 만든 꾸러미에 송이를 가득 담아 나뭇짐에 얹어 집으로 오면 엄마는 맛있는 송이찌개를 끓여 주셨다. 그렇게 많이 나던 송이가 근년에 와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동안 소나무들은 너무 늙었고, 숲은 너무 울창해졌으며, 송이를 너무 샅샅이 따서 포자가 ..

텃밭 일기 2016.10.14

비슬산 참꽃 구경

시인학교 월요반에서 비슬산 참꽃을 구경 가기로 한 날이다. 내 차에 김동원 시인(시인학교 교장), 원용수 선생님, 박영선 시인을 아침 여덟시 반에 지산동에서 태우고 비슬산 자연휴양림 입구까지 갔다. ‘비슬산 참꽃 축제’가 열리는 기간이라서 평일인데도 많이 붐볐다. 오늘 우리 일정이 빠듯하여 걸어서 등산하지 못하고 축제 기간에 운행하는 대견사까지 올라가는 셔틀버스 티켓을 줄을 서서 샀는데, 버스를 타려면 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동안 고령에서 온 김청수 시인과 합류하고, 달성문인협회가 길가에 전시한 비슬산과 참꽃에 관한 시들을 감상했다. 그 중에는 김동원, 김청수 시인의 작품도 있었다. 잠시 길 옆 숲속에서 박영선 시인이 준비한 차를 마시고, 김청수 시인이 준비해온 돼지껍데기 안주를 곁들여 막걸..

텃밭 일기 2016.04.25

가마솥 걸기

오늘은 마당 가 돌담 앞에다 가마솥을 걸 화덕을 만들었다. 옛집에서는 정지(부엌) 안에 가마솥이 걸려 있었지만 20년 전쯤에 양옥으로 집이 새로 지어진 뒤 아버지는 집 뒤뜰에다 화덕을 만들어 무쇠 솥을 걸어 쓰셨는데, 그 솥은 오래전부터 바닥에 금이 가서 물이 조금씩 샐 뿐만 아니라 녹이 슬고 무거워서 불편한 점이 많았었다. 가벼운 알루미늄 솥을 사 와서(호칭치수 50cm, 7만원) 뒤뜰이 아닌 앞마당 돌담 앞에다 화덕을 만든 것이다. 솥 크기에 맞춰 벽돌로 둥글게 쌓아올리고, 동산에서 찰흙을 캐 와서 벽돌 사이에 바르고, 마지막엔 시멘트를 물에 풀어서 발랐다. 시멘트를 바르지 않으면 아무래도 비에 약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궁이의 쇠문은 녹이 많이 슬고 삭았지만, 아직은 쓸 만해서 옛것을 사용했다. 완성..

텃밭 일기 2016.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