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일기

노무현 대통령 10주기

공산(空山) 2019. 5. 23. 22:44

봉하마을에 문상 가던 때가 어제 같은데, 오늘이 벌써 노무현 대통령의 10주기란다. 유신시대와 신군부 시대를 살아온 세대인 나로선 우리 나라 대통령으로서 노무현을 만난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나는 그전에 신동엽 시인의 '산문시1'이라는 시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바로 이 시의 정신에 부합하는 대통령을 드디어 우리 시대에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에, 마음의 지지를 많이 보냈었다. 힘없는 노동자 편에 늘 서 주었던 인권 변호사, 원칙을 중히 여기고 지역주의를 깨뜨리며 국민통합을 위해 노력했던 정치인, 권위주의를 내려놓고 국가 권력을 깨어있는 시민에게 돌려주고자 한 민주주의자, 지방분권을 강화하고 민족의 자존을 끌어올리려고 애썼던 대통령,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가 따돌림 받던 비운의 지도자…… 수평적인 분위기에서의 소신에 찬 토론과 거침없는 그의 연설들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재임기간이 겹쳤던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오늘 봉하에 와서 읽는 추도사는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곳에 오기 전에 저는 권양숙 전 영부인님, 노건호 님 그리고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아주 귀엽고 아름다운 세 명의 손자, 손녀님을 뵙고 환담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환담의 자리에서 저는 가족과 국가를 진심으로 사랑하신 분께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이 자리에 방문하게 됐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제가 최근에 그렸던 노 대통령의 초상화를 전달해드렸습니다. 저는 노 대통령님을 그릴 때 인권에 헌신하신 대통령님을 생각했습니다. 친절하고 따뜻하신 대통령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국민의 기본권을 존중하신 분을 그렸습니다. 오늘 저는 한국의 인권에 대한 그분의 비전이 한국을 넘어 북에게까지 전달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저는 또한 자신의 목소리를 용기있게 내는 강력한 지도자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 목소리를 내는 대상은 미국의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 여느 지도자와 마찬가지로 노 대통령님은 국익을 위해서라면 모든 일도 마다하지 않으셨고 목소리를 내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물론 의견의 차이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한미동맹에 대한 중요성, 그리고 공유된 가치보다 우선하는 차이는 아니었습니다. 저희 둘은 이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참여정부 시절의 첫 비서실장이었던 문희상 국회의장의 추도사도 이어졌다.

 

"국민은 대통령님을 사랑했습니다. 국민장으로 치러지던 이별의 시간 이레 동안, 수백만의 국민은 뜨거운 눈물과 오열 속에 저마다 '내 마음속 대통령'을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반칙과 특권에 맞서 싸웠던 나의 대리인을 잃은 절망이었을 겁니다. 당신에 대한 사랑을 너무 늦게 깨달은 회한이었을 겁니다. 지켜드리지 못했다는 자책이었을 겁니다. 우리는 대통령님과의 이별을 겪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이 고통을 딛고 반드시 일어나겠다는 묵시적인 약속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위대한 국민은 끝도 모를 것 같던 절망의 터널을 박차고 나와 광장에 섰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국민의 힘으로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향해 걷고 있습니다"

 

이어서 진행된 이낙연 총리의 추도사, 정태춘 씨와 노찾사의 노래 공연까지, 추모회가 중계되는 동안 내내 나는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10년 전 봉하마을 분향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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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문시1

    신동엽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 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러셀 헤밍웨이 장자 휴가 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 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소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갯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트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 쪽 패거리에도 총 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 기지도 탱크 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 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 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 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톳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 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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