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일기

반가운 미루나무

공산(空山) 2019. 6. 20. 16:37

요즘은 운동 삼아 부근의 단산지 둘레길을 자주 걷곤 한다. 단산지는 하늘에서 보면 큰 손바닥처럼 생겼고, 손가락 같은 대여섯 개의 만()을 따라 들쭉날쭉한 길은 3.5km나 되어서 한 바퀴 돌면서 산책하기에 적당하다. 좀더 오르내림이 가파른 길을 걷고 싶으면 3.7km의 가운뎃길도 있고, 구절송 전망대까지 연결되는 7km 멀고 높은 바깥길도 있다.

 

물에서 가까운 그 둘레길을 걷다가 얼마 전에는 길가에 서 있는 미루나무 몇 그루를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 계곡쪽으로 만()이 깊숙이 들어온 곳의 어두컴컴한 길가에 참나무와 아카시아, 버드나무, 소나무 등과 함께 서 있어서 그동안은 모르고 지나다녔었다. 천천히 둘레길을 걸으며 찾아보니 아름드리 고목이 일곱 그루나 되었는데, 이 나무가 워낙 물러서 수명이 길지 않은 데다 입지가 구석자리라서 그런지 수형(樹形)이 많이 망가져 있었다.

 

미루나무는 예전에 동네 어귀의 개울가나 신작로의 가로수로 많이 서 있던 나무지만 지금은 거의 볼 수가 없다. 나의 고향 마을 앞에도 우뚝하니 서 있었는데, 키가 가장 큰 나무라서 광석 라디오의 안테나 선을 그 꼭대기에 높이 걸면 모기 소리만 하던 라디오 소리가 좀더 크게 들렸다. 아랫도리의 밋밋한 잔가지를 꺾어 버들피리를 만들기에 좋았다. 멀리서 그 나무들을 바라보면 시원스런 풍경이 좋았다.

 

무엇이든 사라진 것들은 그립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나는 것들은 반갑다. 이 나무들 특유의 향기로운 체취를 맡으며 곁을 지날 때 나는 목례를 하곤 한다. 그 옛날 마을의 어르신들이오, 관동, 황상, 남산 영감님, 그리고 금동 영감님(나의 아버지)이 여기에 다 나오셔서 두런두런 얘기하며 우두커니 서 계시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또 그대로 졸시가 되었다.

 

 

   미루나무

   김상동

 

 

   어떤 큰 분의 손바닥 같은 단산지

   그 들쭉날쭉한 둘레길을 걷다가 만난

   미루나무 고목 일곱 그루

   계곡쪽 컴컴한 길가에 서 있어서

   그동안은 모르고 지나다녔다

   예전엔 고향 어귀에도 서 있어서

   멀리서 바라보면 마을 파수꾼들 같았지

   무엇이든 사라진 것들은 그립고

   오랜만에 만나는 것들은 반갑다

   이 나무들의 체취를 맡으며 지날 때

   나는 목례를 하곤 한다

   이오 관동 황상 남산 수이 영감님

   그리고 나의 아버지 금동 영감님

   여기 다 나오셔서 두런두런 얘기하며

   우두커니 서 계시는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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