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찬호 37

튤립 - 송찬호

튤립 송찬호 먼데 나팔이 울리고, 누군가 2층 창문을 열고 외쳤다 경찰이 오고 있다! 그때 우리는 노랑이나 빨강 두건을 쓰고 튤립당을 결성하여 막 선언문을 낭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벌어진 일은 그대가 알고 있는 것과 같다 백만 송이 대지의 등불이 꺼졌다 삶이 무미하다는 걸 보여주듯 소금이 오는 길은 끊어지고 설탕과 담배도 국경을 넘어 달아나버렸다 강낭콩 꼬투리 속에서 태어난 꾀 많은 곰보 소녀는 일곱 개 이야기 조각을 맞춰 귀가 커다란 나라의 수수께끼 여왕이 되었다 수십 년 바다를 떠돌던 사람들이 간간이 육지에 와 닿는다는 소식이 들린다 하지만 꾀 많은 소녀가 여왕이 된 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 우리가 천국에 환멸을 느낄 무렵 경찰도 마법이 풀렸다 하여, 그들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돼지..

송찬호 2017.08.27

장미

장미 송찬호 나는 천둥을 흙 속에 심어놓고 그게 무럭무럭 자라 담장의 장미처럼 붉게 타오르기를 바랐으나 천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리로만 훌쩍 커 하늘로 돌아가버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나는 헐거운 사모(思慕)의 거미줄을 쳐놓고 거미 애비가 되어 아침 이슬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언젠가 다시 창문과 지붕을 흔들며 천둥으로 울면서 돌아온다면 가시를 신부 삼아 내 그대의 여윈 목에 맑은 이슬 꿰어 걸어주리라 ―「분홍 나막신」문학과지성사, 2016. 3. ------------------------------- 구체와 추상이 의인법으로 얽히고, 청각과 시각이 교차하는 그의 시의 가계도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기실 그리 복잡한 것은 아니다. 이슬도 천둥도 한 몸이다. 천둥소리도 한 몸이다. 사모의 마음으로 가시에 꿰어 붉..

송찬호 2016.05.31

찔레꽃

찔레꽃 송찬호 그해 봄 결혼식 날 아침 네가 집을 떠나면서 나보고 찔레나무 숲에 가보라 하였다 나는 거울 앞에 앉아 한쪽 눈썹을 밀면서 그 눈썹 자리에 초승달이 돋을 때쯤이면 너를 잊을 수 있겠다 장담하였던 것인데, 읍내 예식장이 떠들썩했겠다 신부도 기쁜 눈물 흘렸겠다 나는 기어이 찔레나무 숲으로 달려가 덤불 아래 엎어놓은 하얀 사기 사발 속 너의 편지를 읽긴 읽었던 것인데 차마 다 읽지는 못하였다 세월은 흘렀다 타관을 떠돌기 어언 이십수 년, 삶이 그렇데 징소리 한 번에 화들짝 놀라 엉겁결에 무대에 뛰어오르는 거, 어쩌다 고향 뒷산 그 옛 찔레나무 앞에 섰을 때 덤불 아래 그 흰빛 사기 희미한데 예나 지금이나 찔레꽃은 하얫어라 벙어리처럼 하얫어라 눈썹도 없는 것이 꼭 눈썹도 없는 것이 찔레나무 덤불 아..

송찬호 2016.01.07

기린

기린 송찬호 길고 높다란 기린의 머리 위에 그 옛날 산상 호수의 흔적이 있다 그때 누가 그 목마른 바가지를 거기다 올려놓았을까 그때 그 설교 시대에 조개들은 어떻게 그 호수에 다다를 수 있었을까 별을 헤는 밤, 한때 우리는 저 기린의 긴 목을 별을 따는 장대로 사용하였다 기린의 머리에 긁힌 별들이 아아아아-― 노래하며유성처럼 흘러가던 시절이 있었다 어렸을 적 웃자람을 막기 위해 어른들이 해바라기 머리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을 때, 나는 그걸 내리기 위해 해바라기 대궁을 오르다 몇 번씩 떨어졌느니, 가파란 기린의 등에 매달려 진드기를 잡아먹고 사는 아프리카 노랑부리 할미새의 비애를 이제야 알겠으니, 언제 한번 궤도열차 타고 아득히 기린의 목을 올라 고원을 걸어보았으면, 멀리 야구장에서 홈런볼이 날아오면 ..

송찬호 2016.01.07

코끼리

코끼리 송찬호 나는 거대하다 나는 천천히 먹고 잠자고 천천히 이동한다 벌써 나는 삼만 년째 석상(石像)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이미 오래전 사냥꾼들에게 그림자를 빼앗겼다 그들은 내 몸을 마구 파헤쳤다 내 눈앞에서 초원은 시들고 강과 호수는 사라져버렸다 그들의 배로 열차로 군대로 내 살과 피를 조각내 운반해 갔다 그들은 내 몸을 쇠사슬로 묶었다 내 등에 그들의 의자가 놓여 있다 그들의 식탁과 사무실과 침대가 올라타 있다 그러나 보아라, 그들이 아무리 채찍을 휘둘러 재촉해도 나는 굳세게 천천히 먹고 잠자고 천천히 이동한다 나는 삼만 년째 석상이 되어가고 있다 나는 거대하게 사라져간다

송찬호 2016.01.07

패랭이꽃

패랭이꽃 송찬호 방죽 너머 길가에 패랭이꽃 여자가 피어 있다 여자 나이는 마흔쯤 됐겠다 꽃잎 속눈썹은 삐뚤, 꽃 모가지는 빼뚤, 그런 그 여자의 삐뚤빼뚤한 길을 따라 염소들은 오늘도 학교엘 가는데, 보나마나 오늘 듣고 쓰기 시간 염소들 글씨도 삐뚤빼뚤 그 주위 풍경도 더는 참지 못하고 공장 굴뚝 연기도 삐딱, 앞을 휑하니 지나간 택시의 먼지구름도 삐딱, 부스스 여자는 몸을 일으킨다 지금은 학교에서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 길 가는 누군가 패랭이꽃을 물으면 여자는 자기의 아랫도리를 보여준다 성긴 잎과 줄기, 초록 목발로 서 있는 패랭이 패랭이 패랭이...... 그 여자의 몸에 다보록 패랭이꽃이 모여 사는 곳이 있다

송찬호 2016.01.07

오동나무

오동나무 송찬호 나는 아직도 오동나무를 찾아가던 그 시절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 나는 어떤 푸른 그늘이 필요했다 하여 찾아간 오동나무와의 인사는 아름드리 그 나무 허리를 한번 안아보았던 것 근처에서는 딸기나무 관리인인 검은 염소가 청동의 고삐를 잃어버린 것일까 온통 딸기나무 밭을 헤집어놓고 있었다 오동나무는 말했다 나무 위쪽에 빠끔한 하늘을 그냥 흑판으로 쓰는 작은 산비둘기 학교가 있고 발 아래 뿌리가 뻗어나간 곳까지 일궈놓은 이십여 평의 그늘이 그의 삶의 전부라고 그 말을 들어서일까 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먹는 오동나무 막국수가 얼마나 맛있던지 오동나무 따님이 내온 냉차는 얼마나 시원하던지 그때 계절은 참으로 치열하였다 염소의 두 뿔과 붉은 딸기가 얼마나 범벅이었던지 냇가에서는 돌과 잉어의 배가 ..

송찬호 2016.01.07

가을

가을 송찬호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가슴을 스치자, 깜짝 놀란 장끼가 건너편 숲으로 날아가 껑, 껑, 우는 서러운 가을이었다 딱! 콩꼬투리에서 튀어나간 콩알이 엉덩이를 때리자, 초경이 비친 계집애처럼 화들짝 놀란 노루가 찔끔 피 한 방울 흘리며 맞은편 골짜기로 정신없이 달아나는 가을이었다 멧돼지 무리는 어제 그제 달밤에 뒹굴던 삼밭이 생각나, 외딴 콩밭쯤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지나치는 산비알 가을이었다 내년이면 이 콩밭도 묵정밭이 된다 하였다 허리 구부정한 콩밭 주인은 이제 산등성이 동그란 백도라지 무덤이 더 좋다 하였다 그리고 올 소출이 황두 두말가웃은 된다고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아직 볕이 좋아 여직 도리깨를 맞지 않은 꼬투리들이 따닥따닥 제 깍지를 열어 콩알 몇 낱을 있는 힘껏 멀리 쏘..

송찬호 2016.01.07

만년필

만년필 송찬호 이것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인가 만년필 끝 이렇게 작고 짧은 삽날을 나는 여지껏 본적이 없다 한때, 이것으로 허공에 광두정을 박고 술 취한 넥타이나 구름을 걸어 두었다 이것으로 경매에 나오는 죽은 말대가리 눈화장을 해주는 미용사 일도 하였다 또 한때, 이것으로 근엄한 장군의 수염을 그리거나 부유한 앵무새의 혓바닥 노룻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것으로 공원묘지에 일을 얻어 비명을 읽어주거나 가끔씩 때늦은 후회의 글을 쓰기도 한다 그리하여 볕 좋은 어느 가을날 오후 나는 눈썹 까만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면서, 해바라기 그 황금 원반에 새겨진 파카니 크리스탈이니 하는 빛나는 만년필 시대의 이름들을 추억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래된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지난날 습작의 삶을 돌이켜본다..

송찬호 2016.01.06

민들레역

민들레역 송찬호 민들레역은 황간역 다음에 있다 고삐 매여 있지 않은 녹슨 기관차 한 대 고개를 주억거리며 여기저기 철로변 꽃을 따 먹고 있다 에구, 이 철없는 쇳덩이야 오목눈이 울리는 뻐꾸기야 쪼르르 달려나온 장닭 한 마리 대차게 기관차 머릴 쪼아댄다 민들레 여러분, 병아리 양말 무릎까지 모두 끌어올렸어요? 이름표 달았어요? 네 네 네네네, 자 그럼 출발! 민들레는 달린다 종알종알 달린다 민들레역은 황간역 다음

송찬호 2016.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