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찬호 37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송찬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입안의 비린내를 헹궈내고 달이 솟아오르는 창가 그의 옆에 앉는다 이미 궁기는 감춰두었건만 손을 핥고 연신 등을 부벼대는 이 마음의 비린내를 어쩐다? 나는 처마 끝 달의 찬장을 열고 맑게 씻은 접시 하나 꺼낸다 오늘 저녁엔 내어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여기 이 희고 둥근 것이나 핥아보렴

송찬호 2016.01.06

가방

가방 송찬호 가방이 가방 안에 죄수를 숨겨 탈옥에 성공했다는 뉴스가 시내에 쫘악 깔렸다 교도 경비들은, 그게 그냥 단순한 무소 가죽 가방인 줄 알았다고 했다 한 때 가방 안이 풀밭이었고 강물로 그득 배를 채웠으며 뜨거운 콧김으로 되새김질했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했다 끔찍한 일이다 탈옥한 죄수가 온 시내를 휘젓고 다닌다면 숲으로 달아난다면 구름 속으로 숨어든다면 뿔이 있던 자리가 근지러워 뜨거운 번개로 이마를 지진다면, 한동안 자기 가방을 꼼꼼히 살펴보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다 열쇠와 지갑과 소지품은 잘 들어 있는지 혹, 거친 숨소리가 희미하게나마 들리지는 않는지 그 때 묻은 주둥이로 꽃을 만나면 달려가 부벼대지는 않는지

송찬호 2016.01.06

고양이

고양이 송찬호 여기 경매에 내놓으려 하는 오래된 꽃병이 있어요 꺾은 꽃가지에서 비린내가 나지 않으면 이제 그런 건 거들떠보지도 않네요 그러니 누가 저 꽃병목에 방울을 달겠어요? 쉬잇, 지금은 고양이 철학 시간이에요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모서리 구멍을 응시하고 있네요 아마 지금은 사라져버린 사냥 시대를 생각하고 있겠지요 우리는 모두 어둠과 추위로부터 쫓겨온 무리랍니다 한때는 방안을 뒹굴던 털실 몽상가와 잘도 놀았답니다 현기증 나는 속도의 바퀴와 아찔한 연애도 해봤구요 요즘은 부쩍 네발 달린 것에 믿음이 가는가 봐요 네발 달린 의자에 사뿐히 뛰어 올라 털실이 떠나간 털실 바구니에 들어가 때때로 달콤한 오수를 즐기지요 앗,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방 안 모서리, 손거울, 집 열쇠, 어항의 물고기가 사라..

송찬호 2016.01.06

반달곰이 사는 법

반달곰이 사는 법 송찬호 지리산 뱀사골에 가면 제승대 옆 등산로에서 간이 휴게소를 운영하는 신혼의 젊은 반달곰 부부가 있다 휴게소는 도토리묵과 부침개와 간단한 차와 음료를 파는데, 차에는 솔내음차, 바위꽃차, 산각시나비팔랑임차, 뭉게구름피어오름차 등이 있다 그중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 것은 맑은바람차이다 부부는 낮에는 음식을 팔고 저녁이면 하늘의 별을 닦거나 등성을 밝히는 꽃등의 심지에 기름을 붓고 등산객들이 헝클어놓은 길을 풀어내 다독여주곤 한다 그런데, 반달곰 씨의 가슴엔큼직한 상처가 있다 밀렵꾼들의 총에 맞아 가슴의 반달 한쪽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일전에 반달보호협회에서도 찾아왔다 그대들, 곰은 이미 사라져갈 운명이니 그 가슴의 반달이나 떼어 보호하는 게 어떤가 하고, 돌아서 쓸쓸히 웃다가도 반달..

송찬호 2016.01.06

봄 송찬호 이 적막한 계절의 국경을 넘어가자고 산비둘기 날아와 구욱 국 울어대는 봄날 산등성이 헛개나무들도 금연 구역을 슬금슬금 내려와 담배 한 대씩 태우고 돌아가는 무료한 한낮, 그대가 오면 차를 마시려고 받아온 골짜기 약숫물도 한번 크게 뜨거워졌다가 맹숭하니 식어가는 오후, 멀리 동구가 내다보이는 마당가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도 작년 이맘때보다 허리가 나빠져, 나도 이제는 들어가 쉬어야 하는 더 늦은 오후, 어디서 또 봄이 전복됐는가 보다 노곤하니 각시멧노랑나비 한 마리, 다 낡은 꽃 기중기 끌고 탈, 탈, 탈, 탈, 언덕을 넘어간다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송찬호 2016.01.06

꽃밭에서

꽃밭에서 송찬호 탁란의 계절이 돌아와 먼 산 뻐꾸기가 종일 울어대다 채송화 까만 발톱 깎아주고 맨드라미 부스럼 살펴보다 누워 있는 아내의 입은 더욱 가물다 혀가 나비처럼 갈라져 있다 오후 한나절 게으름을 끌고 밭으로 나갔으나 우각(牛角)의 쟁기에 발만 다치고 돌아오다 진작부터 곤궁이 찾아온다고 했으나 마중 나가진 못하겠다 개와 고양이 지나다니는 무너진 담장도 여태 손보지 않고 찬란한 저 꽃밭에 아직 생활의 문도 세우지 못했으니 비는 언제 오나 얘야, 빨래 걷어야겠다 ​ 바지랑대 끝 뻐꾸기 소리 다 말랐다 ​ ​ ―비평가가 뽑은 2002년 올해의 좋은 시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 2009.5.

송찬호 2016.01.06

채송화

채송화 송찬호 이 책은 소인국 이야기다 이 책을 읽을 땐 쪼그려 앉아야 한다 책 속 소인국으로 건너가는 배는 오로지 버려진 구두 한 짝 깨진 조각 거울이 그곳의 가장 큰 호수 고양이는 고양이 수염으로 알록달록 포도씨만 한 주석을 달고 비둘기는 비둘기 똥으로 헌사를 남겼다 물뿌리개 하나로 뜨락과 울타리 모두 적실 수 있는 작은 영토 나의 책에 채송화가 피어 있다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송찬호 2016.01.06

옛날 옛적 우리 고향 마을에 처음 전기가 들어올 무렵,

옛날 옛적 우리 고향 마을에 처음 전기가 들어올 무렵, 송찬호 마당가 분꽃들은 노랑 다홍 빨강 색색의 전기가 들어온다고 좋아하였다 울타리 오이 넝쿨은5촉짜리 노란 오이꽃이나 많이 피웠으면 좋겠다고 했다 닭장밑 두꺼비는 찌르르르 푸른 전류가 흐르는 여치나 넙죽넙죽 받아먹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가난한 우리 식구들,늦은 저녁 날벌레 달려드는 전구 아래 둘러앉아 양푼 가득 삶은 감자라도 배불리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해 여름 드디어 장독대 옆 백일홍에도 전기가 들어왔다 이제 꽃이 바람에 꺾이거나 시들거나 하는 걱정은 겨우 덜게 되었다 궂은 날에도 꽃대궁에 스위치를 달아 백일홍을 껐다 켰다 할 수 있게 되었다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사,2009.5.

송찬호 2016.01.06

관음이라 불리는 향일암 동백에 대한 회상

관음이라 불리는 향일암 동백에 대한 회상 송찬호 무릇 생명이 태어나는 경계에는 어느 곳이나 올가미가 있는 법이지요 그러니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에 저렇게 떨림이 있지 않겠어요 꽃을 밀어내느라 거친 옹이가 박인 허리를 뒤틀며 안간힘 다하는 저 늙은 동백나무를 보아요 그 아득한 올가미를 빠져나오려 짐승의 새끼처럼 다리를 모으고 세차게 머리로 가지를 찢고 나오는 동백꽃을 이리 가까이 와 보아요 향일암 매서운 겨울 바다 바람도 검푸른 잎사귀로 그 어린 꽃을 살짝 가려주네요 그러니 동백이 저리 붉은 거지요 그러니 동백을 짐승을 닮은 꽃이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송찬호 2015.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