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찬호

기린

공산(空山) 2016. 1. 7. 14:45

   기린

   송찬호

 

 

   길고 높다란 기린의 머리 위에 그 옛날 산상 호수의 흔적이 있다 그때 누가 그 목마른 바가지를 거기다 올려놓았을까 그때 그 설교 시대에 조개들은 어떻게 그 호수에 다다를 수 있었을까

 

   별을 헤는 밤, 한때 우리는 저 기린의 긴 목을 별을 따는 장대로 사용하였다 기린의 머리에 긁힌 별들이 아아아아-노래하며유성처럼 흘러가던 시절이 있었다

 

   어렸을 적 웃자람을 막기 위해 어른들이 해바라기 머리 위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을 때, 나는 그걸 내리기 위해 해바라기 대궁을 오르다 몇 번씩 떨어졌느니, 가파란 기린의 등에 매달려 진드기를 잡아먹고 사는 아프리카 노랑부리 할미새의 비애를 이제야 알겠으니,

 

   언제 한번 궤도열차 타고 아득히 기린의 목을 올라 고원을 걸어보았으면, 멀리 야구장에서 홈런볼이 날아오면 그걸 주워다 아이에게 갖다 주었으면, 걷고 걷다가 기린의 뿔을 닮은 하늘나리 한 가지 꺾어올 수 있었으면

 

   기린이 내게 다가와, 언제 동물원이 쉬는 날 야외로 나가 풀밭의 식사를 하자 한다 하지만 오늘은 머리에 고깔모자 쓰고 주렁주렁 목에 풍선 달고 어린이날 재롱 잔치에 정신없이 바쁘단다 아이들 부르는 소리에 다시 겅중겅중 뛰어가는 저 우스꽝스런 기린의 모습을 보아라 최후의 의 족장을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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