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찬호 37

山經에 가서 놀다

山經에 가서 놀다 송찬호 이 숲속에 얼굴 붉은 짐승이 살고 있어 그를 모든 짐승의 왕이라 칭했다 그가 한번 울부짖으면 여우의 머리가 산산이 부서져버린다 했다 그는 아직 눈에 띄지 않았다 우리는 그를 구경하기 위하여 숲 입구에서 벌써 백리나 뒤쫓아왔다 돌아보자니 숲은 장엄했다 수만 근 무게의 구리 기둥 같은 아름드리 나무가 여기저기 쓰러져 누워 있고 한꺼번에 수백 명의 밥을 지어 먹이던 녹슨 쇠솥이 언덕에 뒹굴고 있었다 우리는 이리저리 숲속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좋은 시절은 쉬이 만날 수 없는 법, 긍휼한 우리들 중 몇몇은 숲 그늘에 앉아 춤추고 노래하고 이끼 낀 누대에 앉아 잠든 돌사자를 어루만지기도 하였다 동백아, 이제 그만 나무에서 내려오려무나 꽃으로 돌아가자 ―「붉은 눈, 동백」문학과지성사,2000.

송찬호 2015.12.31

가난의 빛

가난의 빛 송찬호 사내가 여자와의 사이에 아이들을 차례차례 눕혔다 물먹은 잠수함처럼 아이들은 금세 방바닥 깊이 꺼져 들어갔다 그날 밤 그는 흰 빵보다 더 포근하고 거대한 잠 고래를 보았다 그는 촘촘한 그물을 가만가만 내렸다 그 빽빽한 가난에 걸려들면 무엇 하나 빠져나갈 수 없었다 그물이 찢어지도록 밤새도록 걷어 올린 발 디디면 금방 꺼질 것 같은 조그만 섬들, 그의 아이들 그는 조심조심 그 징검다리를 밟고 건너가 그렇게 또 하룻밤 자고 되돌아갔다 물가에서 울고있는 빈 항아리 같은 여자를 남겨 두고 기와 한 장 깨져도 비가 새듯 비늘 한 장 떨어진 창 너머 당신들의 방이 훤히 들여다 보였습니다 가난의 빛이 눈부시게 흘러나왔습니다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민음사1989.

송찬호 2015.12.30

부유하는 공기들

부유하는 공기들 송찬호 그는 아주 느린 삶을 살았다 촛불과 고양이와 잔소리 많은 공기의 여자와 함께 촛불은 날마다 몇 개의 밤을 더 달라고 졸랐다 그는 촛불에게 진주가 들어 있는 밤은 이 세계에서는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거라고 일러주었다 그는 오래 우정을 나눴던 나무와 그의 삶의 보폭을 맞췄다 그 나무는 지난 백년 동안 오직 한 걸음만 앞으로 내디뎠기에, 정의가 그렇게 누추할 수가 없었던 시대, 그는 한 걸음만 나아가 오래된 미래를 기다렸다 한꺼번에 세 걸음 이상 걸으면 공기는 죽기 때문에 —「시인동네」2015년 여름호

송찬호 2015.12.29

백한 번째의 밤

백한 번째의 밤 송찬호 촛불 세 자매는 밤을 맞을 채비를 했다 식탁을 치우고 은접시를 닦고 아궁이 불을 꺼뜨리고 동면에 들어갈 벌들에게 캄캄한 꿀을 먹였다 이윽고 밤이 찾아왔다 커튼이 드리워지고 문들은 굳게 닫혔다 현관엔 무거운 쇠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고 문밖 매어둔 나무염소도 꿈쩍 않고 서 있었다 촛불 자매들은 나직나직이 일렁거리며 불의 수의를 짰다 피투성이 재투성이 밤의 어깨와 허리 치수를 재어가면서 그리고, 이런 노래를 불렀다 어디선가 싸움은 그치질 않고 기다리는 사람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어라 아득하여라, 앞날을 보지 않기 위하여 우린 밤의 눈을 찔렀네 —「시인동네」2015년 여름호

송찬호 2015.12.29

목 부러진 동백

목 부러진 동백 송찬호 이제 나는 돌부처의 목 부러진 이유를 알겠다 부러져 뒹굴며 발끝에 채이는 미소의 이유를 알겠다 내 안에서 서로 싸우는 짐승들 또한 그렇다 그래, 너희들, 그렇게 싸우는 분명한 선악의 경계가 있는 것이냐 人面과 獸心중 분명한 승자가 있는 것이냐 오늘은 아예 인면이나 수심의 어느 한쪽 얼굴이 아닌 두루뭉수리 인면수심의 얼굴로 돌아다녀야겠다 그러다 인면수심마저 내려놓고 불로와 불사마저 벗어버리고 떨어져나간 목 위에 동백이나 얹어놓아야겠다 그래 그래,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가는 건들바람들 너희도 목 부러지겠다 ―「붉은 눈, 동백」 문지. 2000

송찬호 2015.12.29

바구니

바구니 송찬호 언제나 하늘은 빈 바구니로 내려왔다 바구니가 비었으니 아직 살아 있나 보다 여인은 다시 밥 바구니를 하늘로 올려 보냈다 아, 뭉클한 밥 바구니가 한 입에 하늘로 꺼져 들어가곤 하였다 옷을 넣어 보내면 금방 피고름 빨래가 되어 내려왔다 여인의 몸도 점점 꺼져 들어갔다 기약 없는 세월은 물같이 흘렀고 그 물가에서 여인은 시름없이 빨래를 하였다 물은 날마다 더럽혀져 갔다 그 물이 흘러가는 어디선가 다시 근심 많은 여인들이 더럽혀진 물로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빈 바구니 속에서 아이는 끊임없이 울었다 여인은 바구니처럼 웅크리고 앉아 꼼짝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자라 여인을 버리고 다시 이 지상을 떠날 때까지 날마다 바구니 가득 그렇게 오르고 싶었던 하늘 오, 저 밑 버림받은 세상에는 몸 움푹움푹..

송찬호 2015.12.29

봄밤

봄밤 송찬호 낡은 봉고를 끌고 시골 장터를 돌아다니며 어물전을 펴는 친구가 근 일 년 만에 밤늦게 찾아왔다 해마다 봄이면 저 뒤란 감나무에 두견이 놈이 찾아와서 몇 날 며칠을 밤새도록 피를 토하고 울다 가곤 하지 그러면 가지마다 이렇게 애틋한 감잎이 돋아나는데 이 감잎차가 바로 그 두견이 혓바닥을 뜯어 우려낸 차라네 나같이 쓰라린 인간 속을 다스리는 데 아주 그만이지 친구도 고개를 끄덕였다 옳아, 그 쓰린 삶을 다스려낸다는 거! 눈썹이 하얘지도록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다 새벽 일찍 그 친구는 상주장으로 훌쩍 떠나갔다 문 가에 고등어 몇 마리 슬며시 내려놓고 -- 2000년 제19회 김수영문학상 수상시

송찬호 2015.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