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47

여승

여승 백석 여승은 합장을 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녯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딸은 도라지 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 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 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사슴」1936. 1. --------------------------- 금덤판 - 금점판. 예전에 주로 수공업적 방식으로 작업하던 금광의 일터. 섶벌 - 토종벌을 이르는 말로 토종벌 중에서도 꿀을 모우기 위해 주로 나가다니는 '일벌'을 가리킴.

백석 2015.12.13

백석 - 눈을 맞고 선 굳고 정한 갈매나무 - 신경림

백석 - 눈을 맞고 선 굳고 정한 갈매나무신경림(시인)    1 내가 백석 시인을 알 게 된 것은 중학교 시절 정기구독하고 있던 한 월간지에 박목월 시인이 연재하고 있던 시 창작 강좌를 통해서이다. 거기 백석 시인의 「오리 망아지 토끼」와 「여우난골」 그리고 「비」가 소개되어 있었는데, 나는 단박에 백석이 좋아졌다. 지금 생각하니 내가 시를 좋아하게 된 것도 실은 백석 시인으로 인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강좌에 소개된 시집 『사슴』을 구하려고 노력했지만 시골서 구할 길은 없었다. 그 얼마 뒤에 책방에서 『학풍』이라는 새로 나온 잡지를 뒤적이다가 거기 그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이라는 시가 실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자리에 서서 읽고 나는 너무 놀랐다. '시란 이런 것이로구나.' 아마 이런 생..

백석 2015.12.10

백석의 시 - 이동순

백석의 시 -- 문명과 반문명에 관한 시적 담론 이동순 시 작품과 전통성 분석의 중요성 한 편의 시 작품을 단지 그 작품의 제작자인 시인의 삶을 다룬 것으로만 단정할 수는 없다. 시 작품이라는 특정한 언어적 구조물 속에는 그 시대 주민들이 살아온 삶의 정황과 정치·사회적 환경 및 기타 총체적 상징성이 모두 함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작품을 이루어 내는 창작 스타일이나 가치관, 방법론에 따라서 주변적 환경의 수용과 반영 범위가 극히 제한적이거나 혹은 과다할 정도로 범람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규모와 부피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외적 정황의 반영은 일정한 범위 안에서 반드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한 편의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그 작품에 나타난 시인 자신의..

백석 2015.12.08

北方에서

北方에서                              -- 鄭玄雄에게     백석       아득한 녯날에 나는 떠났다    扶餘를 肅愼을 渤海를 女眞을 遼를 金을.    興安嶺을 陰山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익갈나무의 슬퍼하든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든 말도 잊지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에 보내든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딸어나와 울든것도 잊지않었다.     나는 그때     아모 익이지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해ㅅ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먹고 단샘을 마시고 ..

백석 2015.11.16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백석 2015.11.15

흰 바람벽이 있어

흰 바람벽이 있어 백 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 셔츠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 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굿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

백석 2015.11.15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출출이 - 뱁새 마가리 - 오막살이 고조곤히 - 고요하게 ● 백..

백석 2015.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