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백석의 시 - 이동순

공산(空山) 2015. 12. 8. 19:16

백석의 시

-- 문명과 반문명에 관한 시적 담론

이동순

 

시 작품과 전통성 분석의 중요성
 

한 편의 시 작품을 단지 그 작품의 제작자인 시인의 삶을 다룬 것으로만 단정할 수는 없다. 시 작품이라는 특정한 언어적 구조물 속에는 그 시대 주민들이 살아온 삶의 정황과 정치·사회적 환경 및 기타 총체적 상징성이 모두 함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작품을 이루어 내는 창작 스타일이나 가치관, 방법론에 따라서 주변적 환경의 수용과 반영 범위가 극히 제한적이거나 혹은 과다할 정도로 범람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규모와 부피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외적 정황의 반영은 일정한 범위 안에서 반드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한 편의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그 작품에 나타난 시인 자신의 문학적 포부와 의도를 주시해야 하겠지만, 이와 더불어 작품 속에 반영된 당대적 삶의 특이성에 대해서도 각별한 포착과 비평적 분석이 필수적으로 뒤따라야 하리라고 본다.

 

가령 만해 한용운의 시 작품으로 예를 들어 본다 할지라도 시집 『님의 침묵』에 나타난 만해 특유의 문체와 그 효과의 이면에 가려져 있는 시대적 분위기와 환경을 우리는 다시금 면밀히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대다수의 시인과 그 작품 세계에도 공통되는 경우라 하겠다. 한용운과 김영랑, 정지용과 김기림의 시 작품을 두고 보더라도 두 시인이 각각 자기 시대의 삶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관점이나 견해가 서로 확연히 구별되는 면이 있으므로 그 변별성에 일단 주목하면서 사물을 해석하는 두 시인의 시적 관점과 그 차이점을 고찰해야 한다.

 

각기 다른 작품성이 이루어 낸 이러한 결과들이 모여서 한 시대의 중심적 전통을 형성한다. 이를테면 1930년대 시단()의 전통은 그 시대를 배경으로 활동했던 모든 시인들의 작품을 대상으로 하여 정확한 검증과 분석을 거쳐서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더불어 그 시대에 이룩된 전통은 이전 시대로부터 전달 계승되어 온 어떤 연속적 성격의 특질에 의하여 보다 크고 놀라운 것으로 발전되고 확장될 수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1930년대의 문학적 전통은 이후 시대의 문학사로 큰 무리와 변수가 없는 한, 자연스럽게 상류에서 하류로 흘러가는 물줄기처럼 계속 이어져서 또 다른 형태의 문학적 전통을 이룩하도록 추동하는 것이다.

 

물론 1930년대의 문학적 전통은 고의적 망실로 유도하려는 일제 식민 통치자들의 정치적 조작과 통제에 의하여 혹심하게 유린되고 조작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를 겪으면서도 1930년대의 문학적 전통은 분단 이후의 문학사로 이어져서 작품성의 질적 측면에 있어서 보다 확고한 발전에 다다를 수 있었던 것이다. 한 편의 작품을 읽으며 우리는 그 작품에 무르녹아 있는 포괄적 전통성과 그 범위에 대하여 남다른 탐구심을 갖게 된다. 문학인 자신이 특별하게 전통이라는 문제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경우라면 그의 작품에 대한 탐구 의욕과 호기심은 한층 강하게 작용한다. 그러한 측면에서 문학작품에 나타난 전통성의 문제와 그 비평적 담론은 매우 중요한 영역으로 부각된다.

백석의 전통관과 배경

여기 한 시인이 있다. 그는 일제 식민 통치기 중후반기의 조선 문단을 배경으로 활동을 하다가 분단을 겪으며 문학인으로서의 정체성에 심한 교란을 겪게 된다. 당시 모든 문학인이 그러하였듯이 그 또한 정치적 판단과 선택이라는 가파른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청년 시절 수년간 서울 문단에서 활동했던 경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 후 만주 일대를 유랑민처럼 떠돌면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부유적() 삶을 살았다. 그러한 와중에서 해방이 되었고, 조국은 정치적 이념과 지향을 달리하는 두 체제로 분단되었다. 그의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 한반도의 관서 지역이었다. 시인의 부모 형제와 일가친척 모두가 고향 부근에서 살았다. 시인 또한 떠돌이 생활을 정리하면서 고향 가까이서 살고 싶었을 것이다. 굳이 서울로 월남해 내려올 만한 어떤 정치적 신념이나 노선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해방 이후 북쪽에 수립되었던 공산주의 정권 치하에서 그는 한 사람의 주민으로서 당시 사회의 중심권으로 진입하지 않고 비교적 온건하고 소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가 한때 거주했던 한반도의 남쪽 지역에서는 완전히 잊혀진 시인이 되었다. 우리는 이를 일러 문학사에서의 매몰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다가 1987년 서울에서 분단 시기까지의 그의 작품을 모은 시 전집이 발간되었다. 이후로 그는 남한의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인으로 화려하게 되살아났다. 그의 이름은 백석이다. 백석의 문학이 지니고 있는 특성에 대하여 필자는 다각적으로 검토 분석한 바 있거니와 그로부터 여러 해가 경과한 오늘에 백석의 시를 차분히 정독하더라도 그 특유의 신선함과 발랄함, 그윽함과 도란거림의 예술적 음영과 세력은 전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특이한 효과로 점차 확장되어 가는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확장과 보편화가 주는 놀라움의 근원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오로지 백석의 문학이 가장 주안점을 두었던 민족적 전통성이라는 가치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서양 문학(영문학)을 전공했거나 혹은 강의를 들었던 시인들이 대개 서양 문학의 방법론이나 그 분위기에 심취해서 단순 모방자나 그 에피고넨(epigonen, 아류)이 되기가 십상인데 한국 문학사에서는 특이한 세 시인의 경우가 그 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김소월, 정지용, 백석이다. 서양 문학을 공부한 경험을 가졌으면서도 오히려 그들은 민족의 전통이라는 후미진 뒷골목으로 돌아 들었던 것이다. 특히 소월의 전통성 지향에 대해서 김춘수는 『한국 현대 시 형태론』(해동문화사, 1958)에서 "청소년들 간에 문학열이 왕성해지고, 많은 문학잡지가 쏟아져 나오면 나올수록 그의 눈에는 한국의 문학과 시가가 외래 사조의 잡음 속에서 귀머거리가 되어 가고 있는 것으로만 비쳤던 것이다. 의식적으로 그(김소월)는 이 조류에 귀를 막고 돌아앉아 버렸다고 할 것이다. 이것이 소월을 대할 적에 우리의 문제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라고 정리하고 있다.


김춘수는 소월의 그러한 태도와 경향을 분석하면서 '도도한 역사의 흐름'(서양 문학을 대세로 하는 전 세계적인 보급과 유행)을 독단에 의하여 의식적으로 막으려는 외고집 같은 것이 있다고 지적하였다. 비록 서양 문학 중심적 교양과 사고를 지니긴 했지만 소월에 대한 김춘수의 이러한 지적은 정확하다. 김춘수가 지적했던 소월의 그 '독단과 외고집'이야말로 소월의 당당한 창작 스타일과 문학적 태도를 고스란히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더불어 전통이라는 문제에 임하는 소월의 자세가 어떠했던 것인지를 극명하게 알려 준다.

 

백석 시인의 경우도 소월의 전통관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일본 아오야마 학원 영문과에 재학하며 영미 문학에 관한 지식과 교양을 충분히 습득하였던 백석이 어떻게 민족적 전통이라는 가치관 쪽으로 확연히 돌아앉아 시 창작의 중요 테마로 떠올리며 애착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인가. 백석의 시는 모더니즘을 통해 창작 방법론을 익혔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모더니즘이 지닌 한계와 제한성을 비판하고 극복하는 방법으로 변화를 주었다. 이러한 작업은 식민지 자본주의가 드러내고 있던 여러 부정적 파괴적 징후를 시인이 매우 침통한 표정으로 응시하며 고뇌하는 활동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전승된 물질문화에 관한 시적 코멘트

백석의 시 세계는 한국과 한국인의 전승된 물질문화와 관련된 시적 코멘트가 매우 풍부하게 담겨져 있다. 식민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인의 기획에는 일정한 창작 의도가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백석의 시 형태가 지니고 있는 독특함은 같은 시대 다른 시인들의 작품과 명확히 변별된다. 필자는 산문 형태의 줄글이 지니고 있는 형태적 고유성을 분석하면서 조선 후기 사설시조와 비교를 시도한 적이 있다. 백석의 여러 시 작품을 반복해서 읽어 볼수록 사설시조 형태의 잔존 양식을 감지해 낼 수 있다. 물론 백석 시인이 사설시조 양식에 대한 선호를 어떤 경우에서건 스스로 밝힌 적이 없으나 어려서부터 시조 작품을 친숙하게 접해 왔던 경험이 자연스럽게 전승된 과정으로 설명이 될 수 있다고 하겠다.


백석은 자신의 창작 세계를 통하여 한국인의 민족적 설화 테마를 즐겨 채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러 작품들에서 시인은 민담의 밑그림을 통한 시 작품의 구조화를 기획하고 있고, 이 과정의 배경에는 시인 자신의 의도된 설정이 느껴진다. 다음 작품은 유소년 시절의 밤을 추억하는 시적 진술로써 전승되는 민담을 적절히 활용하여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날기멍석을 져간다는 닭보는 할미를 차 굴린다는 땅 아래 고래 같은 기와집에는 언제나 니차떡에 청밀에 은금보화가  그득하다는 외발 가진 조마구 뒷산 어느메도 조마구네 나라가 있어서 오줌 누러 깨는 재밤 머리맡의 문살에 대인 유리 창으로 조마구 군병의 새까만 대가리 새까만 눈알이 들여다보는 때 나는 이불 속에 자즐어붙어 숨도 쉬지 못한다
   -- 「고야()」 중에서

 

이처럼 백석이 민속적 자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민속적 자료를 함유하고 있는 한국인이라는 집단의 정체성이 제국주의 침탈의 위기 앞에서 현저히 손상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러한 정체성의 손상은 치명적 복구 불능에 다다를 수 있는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시 작품이라는 정서적 공간을 활용하여 재구성해 두고자 하려는 일종의 시적 스크랩에 관한 의지로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백석이 작품 공간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의욕을 나타내 보였던 분야는 다양하다. 우선 토속 음식에 관하여 시인은 매우 특별한 선호를 보인다. 음식은 의식주라는 인간의 기본적 삶에서 두 번째에 해당하는 중요도를 지닌다. 무엇을 먹는가라는 문제는 어떻게 기본적 삶을 충실하게 지속해 가는가 라는 가능성의 여부와 그대로 직결된다. 식민지 시대에서 피지배 민중으로서의 한국인들은 우선 식량에 관한 위기를 모질게 겪었다. 그러한 위기의 중심에는 태풍과 수해, 가뭄으로 인한 농업 생산의 실패도 있었지만 위기를 초래한 가장 혹심한 배경에는 제국주의자들의 조직적 토지 수탈과 농업 해체, 농민 분해가 있었다.

 

점차 가속화되는 민족적 정체성의 위기 앞에서 백석 시인은 소박한 토속 음식에 관한 각종 사례들을 낱낱이 열거 제시함으로써 한국인의 정체성 자각과 보존 의식에 자극을 주고자 했던 것이다. 백석의 작품에는 민간 향약과 민간요법에 관한 코멘트도 다수 등장하고 있다. 무속과 관련된 테마들도 자주 등장한다. 아동 유희의 사례들도 발견된다. 자녀 교육과 관련된 훈계, 한국인의 마을에서 펼쳐지는 각종 의식과 행사를 비롯하여 친족 공동체의 정겨운 장면들도 지속적으로 구사되고 있다.1) 이 모두가 우리 민족의 삶에서 오랜 발효와 숙성의 과정을 거쳐 형성된 정서로서 민족적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하여 이를 보존하려는 시인 특유의 시적 스크랩으로 이해될 수 있다.

사고와 행위 양식에 관한 시적 코멘트

백석의 문학 세계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 중의 하나는 방언 구사라 하겠다. 주로 관서 지역, 즉 평안도 북부 지역의 방언을 완강하게 활용하고 그 투박한 분위기를 직접 작품 속에 등장시키려는 시인의 의도와 배려가 엿보인다.
방언이라는 것은 모국어 중에서도 민족적 토착적 정서가 가장 풍성하게 잔존해 있는 공간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방언은 매우 보수적이며 고립적인 요소가 있다. 항시 특정 지역만의 고유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다른 지역과의 교섭과 연결을 차단하는 폐쇄성을 지닌다. 실제로 백석의 시 작품을 읽어 가는 과정에서 느닷없이 돌출하는 생경한 평북 방언으로 말미암아 불편을 겪는 경우가 빈번하다. 일부러 낱말 풀이를 번번이 활용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다.

 

갈부던, 된비, 나무뒝치, 울파주, 엄지, 매감탕, 숨굴막질, 아르간, 조아질, 화디, 홍게닭, 텅납새, 무이징게국, 노나리꾼, 날기멍석, 니차떡, 조마구, 앙궁, 눈세기, 갑피기, 깽제미, 막써레기, 구신간시렁, 당즈께, 아르대즘퍼리, 당세, 집오래, 임내, 나무말쿠지, 개니빠디, 동말랭이, 시악, 돌덜구, 시라리타래, 자즌닭, 그느슥한, 자벌기, 이스라치전, 금덤판, 섭벌, 어니젠가, 가제, 달궤, 비난수, 왕구새자리, 아즈내, 호루기, 오구작작, 다디기, 장 이, 닭이깃 올코, 새기달은치, 소이연, 쇠드랑볕, 새기락, 홰냥닭, 쌈지거리, 보해 짖고, 담모도리, 낫대들었다······.

 

백석의 시에서 우선 눈에 띄는 방언 사례 중 완강한 어휘 구사를 나타내 보이고 있는 단어를 옮겨 보았다. 일반 독자들의 경우 이 어휘 가운데 과연 몇 종이나 납득할 수 있을 것인가. 마치 외국어를 대하는 듯한 생경함에 당혹할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그러한 방언이 지니는 즐거운 호기심, 특정 사물에 대하여 관서 방언에서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라는 흥미로운 관심과 기대 심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백석이 자신의 시 작품에서 방언 효과를 십분 활용하고 있는 이유는 이러한 점에서 충분한 납득이 된다. 백석의 시는 방언 효과를 중시하되 그 방언 속에 폐쇄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다. 방언 구사에 대한 시인의 이러한 태도는 마침내 방언이 지니는 단절과 고립, 폐쇄성을 일시에 극복하며 보편성의 세계로 자연스럽게 흡수되는 것이다.

 

   어스름저녁 국수당 돌각담의 수무나무 가지에 녀귀의 탱을 걸고 나물매 갖추어놓고 비난수를 하는 젊은 새악시들
(중략)
벌개늪녘에서 바리깨를 뚜드리는 쇳소리가 나면 누가 눈을 앓어서 부증이 나서 찰거마리를 부르는 것이다
마을에서는 피성한 눈슭에 저린 팔다리에 거마리를 붙인다
   --「오금덩이라는 곳」 중에서

 

백석은 방언뿐만 아니라 속담과 각종 전설, 민담이 지니는 풋풋한 정서와 효과까지 매우 재치있게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백석의 작품성은 1930년대 한국인의 삶과 문화적 특성을 확인하게 해 주는 중요한 구비문학적 자료로써 상당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사람이나 사건에 관한 인상을 다룬 시적 코멘트

백석이 자신의 문학 세계를 통하여 주로 그려 내고자 했던 테마는 오로지 한국과 한국인이라는 민족적 표상이었다. 시집 『모닥불』에서 하나의 구성과 기획을 형성하고 있는 기본 테마는 친족()이라는 개념이다. 「여우난골족」, 「고야」, 「가즈랑집」, 「고방」 등을 비롯하여 시집 『사슴』의 세계는 온통 친족 집단의 분위기로 충만되어 있다. 시인은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씨족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변방 지역 농촌 마을의 삶과 정경을 매우 구체적으로 그려 내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시대적 배경은 식민지라는 핍박의 시간이다.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일도 없는 듯이 보이지만 속에 감추어진 이면에서는 각종 수탈과 민족 정체성의 손상과 망실이 조직적 계획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경영에 적극 부응하고 협력했던 부류들은 절대 다수가 대토지를 소유한 지주와 자본가들이었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비호하는 친일 관료들이었다. 백석의 시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 중에 이러한 지배 군상들에 관한 코멘트를 찾아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등장인물의 절대 다수는 농민이며 서민이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인 아동을 즐겨 다루고 있다. 또한 백석은 동일한 민족 공동체 구성원 중에서도 유난히 봉건적 핍박과 억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존재로서의 여성성을 있는 그대로 다루고자 하는 의도를 나타내고 있다. 백석의 시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성은 자신의 위치에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가부장적 권위를 지닌 남성들로부터 버림받은 여성,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마침내 머리를 삭발하고 비구니가 되어 버린 여인, 식모살이를 하고 있는 가련한 소녀, 부잣집 씨받이로 들어가는 대가로 가족들을 부양하는 젊은 과부, 칼날 위에서 춤추는 신들린 소녀, 결핵에 걸려 죽어 가는 창백한 미혼 여성 등이다. 그들은 대개 현실의 중심에서 극도로 소외된 군상들이다. 거의 대부분 낮고 평범한 민중 신분들이며, 하나같이 외롭고 쓸쓸하며 가난한 서민들이었다. 한편 백석 시인은 지체 장애인에 대해서도 따뜻한 포용의 자세를 나타내 보인다.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디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잎도 머리카락도 헌겊 조각도 막대꼬치도 기왓장도 닭의 깃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 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붓장사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 「모닥불」

 

시 「모닥불」에 등장하는 '몽둥발이 소년'은 부모를 모두 잃은 고아로서 어떤 환난을 당하여 신체적 불구가 되었다. 하지만 시인은 불구가 된 소년의 구체적 내력을 밝히지 않는다. 다만 독자들로 하여금 상상력으로 풀어 가도록 이끌고 있다. 시인이 발표한 단편소설 작품에서도 불구 노인 부부의 삶을 매우 극명하게 리얼한 필치로 그려 내고 있다. 백석이 그려 낸 지체 장애인은 상징적 표상으로서의 한국인에 다름 아니다. 시인은 제국주의자들에게 온갖 유린과 수탈을 당하여 신체적 자유를 박탈당한 한국인의 전형성을 지체 장애인의 표상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갖가지 상징군으로 드러나는 시적 코멘트

우리가 백석의 시를 읽으며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시인이 한국인의 뿌리와 기원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는 부분이다. 이런 관점에서 시 「북방에서」는 새롭게 분석되어야 할 중요 텍스트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이 작품은 한국인의 근원적 심성에 내재한 유목민 의식을 농도 짙게 다루고 있다.

 

   아득한 옛날에 나는 떠났다
   부여()를 숙신()을 발해()를 여진()을 요()를 금()을
   흥안령()을 음산()을 아무우르를 숭가리를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고 나는 떠났다

   나는 그때
   자작나무와 이깔나무의 슬퍼하던 것을 기억한다
   갈대와 장풍의 붙드던 말도 잊지 않었다
   오로촌이 멧돌을 잡어 나를 잔치해 보내던 것도
   쏠론이 십리길을 따러나와 울던 것도 잊지 않었다

   나는 그때
   아무 이기지 못할 슬픔도 시름도 없이
   다만 게을리 먼 앞대로 떠나 나왔다
   그리하여 따사한 햇귀에서 하이얀 옷을 입고 매끄러운 밥을 먹고 단샘을 마시고 낮잠을 잤다

   밤에는 먼 개소리에 놀라나고
   아침에는 지나가는 사람마다에게 절을 하면서도
   나는 나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다

   그 동안 돌비는 깨어지고 많은 은금보화는 땅에 묻히고 가마귀도 긴 족보를 이루었는데
   이리하여 또 한 아득한 새 옛날이 비롯하는 때
   이제는 참으로 이기지 못할 슬픔과 시름에 쫓겨
   나는 나의 옛 하늘로 땅으로 - 나의 태반()으로 돌아왔으나
   이미 해는 늙고 달은 파리하고 바람은 미치고 보래구름만 혼자 넋없이 떠도는데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

   -- 「북방()에서 - 정현웅()에게」

 

시인은 한국인이 원래 몽골과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북방 지역의 대초원에서 살다가 점차 남쪽으로 이동해 온 유목민으로서의 기원설을 긍정하고 있는 듯하다. 북방 지역에서 생존의 악조건 중에서 가장 혹독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한겨울의 무서운 추위였을 것이다. 이 추위를 피하여 보다 따뜻한 남쪽 지역으로 이동해 내려와서 마침내 한반도 일대에 다다른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시인은 이러한 한국인의 민족 기원설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백석 시인은 한국인의 원래 터전이었던 아득한 북방을 직접 답사해 보고자 하는 의욕을 나타내 보인다. 실제로 백석은 일제 말 만주 거주 시절에 북만주와 몽골 지역 일대까지 답사한 흔적을 작품 속에 반영하고 있다. 민족적 근원과 뿌리에 관한 탐구심을 열정적으로 실천해 가는 시인의 자세는 국토와 민족에 대한 애착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그 국토와 민족은 일본이라는 외세에 의하여 중심이 점유되고 경영 주체마저도 박탈되어 버린 상태이다. 그러므로 민족적 근원을 찾아서 떠돌아다니는 시인의 표상은 마치 농토를 잃고 두만강을 넘어온 유랑민의 내적 정서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백석의 작품 세계가 지니는 다양한 미학적 장치 중에는 민족의 뿌리에 관한 탐구나 노인 존중에 대한 태도도 확인된다. 시 「북관()」, 「북신()」, 「고향」 등의 작품에서 이와 같은 점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다. 시 「북관」에서는 명태 창난젓이라는 향토 음식을 테마로 민족의 기원과 뿌리, 이동 경로에 대한 탐구까지 펼쳐 간다. 시 「북신()」에서는 산골 객주집에서 돼지를 잡아 삶은 수육을 국수와 함께 즐기는 지역민들의 식생활과 그 서민적인 삶의 전형성을 정겹게 그리고 있다. 음식 문화를 통하여 역사적 시간성을 상상하는 시인의 자세가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명태() 창난젓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 무이를 비벼 익힌 것을
   이 투박한 북관()을 한없이 끼밀고 있노라면
   쓸쓸하니 무릎은 꿇어진다

   시큼한 배척한 퀴퀴한 이 내음새 속에
   나는 가느슥히 여진()의 살내음새를 맡는다

   얼근한 비릿한 구릿한 이 맛 속에선
   까마득히 신라() 백성의 향수()도 맛본다
   -- 「북관() - 함주시초() 1」

   어쩐지 향산() 부처님이 가까웁다는 거린데
   국수집에서는 농짝 같은 도야지를 잡어 걸고 국수에 치는 도야지고
   기는 돗바늘 같은 털이 드문드문 백였다
   나는 이 털도 안 뽑은 도야지고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또 털도 안 뽑은 고기를 시꺼먼 맨모밀 국수에 얹어서 한입에 꿀꺽
   삼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가슴에 뜨끈한 것을 느끼며
   소수림왕()을 생각한다 광개토대왕()을 생각한다
   -- 「북신() - 서행시초(西) 2」 중에서

 

경로 효친의 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요소를 다루고 있는 작품 「고향」은 한국인의 삶에 전통적으로 용해되고 그 저층()에 깃들여 온 유학 사상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백석의 시에 나타난 그 흔적은 매우 은근하고 따뜻하다. 시인이 관심과 애착을 가졌던 부분은 바로 이러한 정서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는 북관()에 혼자 앓어 누어서
   어느 아츰 의원()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 같은 상을 하고 관공()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집드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중략)
   의원()은 또 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어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 「고향」 중에서

 

한편 백석의 문학 세계 전반을 통하여 우리는 자연과 환경이라는 문제에 관한 시인의 특별한 애착과 보존 의식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로서는 오늘의 우리가 겪고 있는 심각한 환경오염의 위기가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식민지 경영자들인 제국주의자들에 의하여 무수히 자행되었던 혹심한 산림자원 벌채, 이로 인한 홍수의 피해, 관개시설의 미비로 인한 하천의 상습적 범람, 총체적으로 운영되는 식민지 개발 독재로 말미암은 국토의 훼손은 위기의 수준에 다다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백석은 자신의 시 작품에서 한국의 동물, 한국의 토착 식물들까지 정겨운 자세로 다루려는 자세를 나타내 보였다. 백석의 시 작품이 북방 지역 일대의 풍경을 묘사하면서 자작나무 숲, 승냥이 울음이 들리는 밀림, 고원 지대의 신선한 아름다움 따위를 즐겨 다루고 있는 의도를 다시금 음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더불어 백석은 한국인의 풍류에 관한 시적 코멘트도 즐겨 다루었다. 이 또한 한국인의 민족적 정체성 보존에 대한 시인의 강한 의지를 반영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시적 측면과 요소가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백석의 작품 세계는 한국인의 삶과 전통을 생생하게 보존하고 있는 박물학적 공간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겠다.

제국주의 외세에 맞서는 한국인의 문화적 전통

지금까지 우리는 백석의 문학 세계가 나타내고 있는 전통성의 다양한 갈래와 그 의미에 대하여 낱낱이 점검하고 확인해 보았다. 이 과정을 통하여 우리가 거듭 확실한 심증을 갖게 된 사실은 시인 백석이 식민지라는 정치적 문화적 폐쇄 공간 속에서 문명과 반문명에 관한 시적 담론을 지속적으로 펼치는 작업에 몰두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관된 노력에 힘을 쏟은 것이 당시 시인이 품고 있었던 일정한 비평적 의도의 반영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당시 일제 식민 통치자들은 서양의 근대 문물을 일찍부터 받아들여 자신들이 이룩한 서양 아류를 이른바 '앞서 가는 문명'으로 자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한국을 불법적으로 병탄하고 식민지로 경영하기 시작하면서 식민 통치 그 자체를 반문명 세계의 문명 세계화로 합리화하고자 했다. 말하자면 한국과 한국인을 '미개()'로 규정하면서 민족 차별과 유린의 시간을 불러오게 하였고, 한국인의 토착 신앙도 '미신()'으로 명명하면서 각종 유적과 문화재의 파괴, 약탈로 이어지는 시간을 초래했던 것이다. 식민 통치자들의 이러한 시도에 대하여 백석 시인은 과연 어떤 것이 진정한 문명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작품을 통해 제기하였다. 사상, 관행, 행동, 기술 양식 따위의 관습을 포함하여 한국인이 전통적으로 지키고 갈무리해 왔던 풍속과 전통이야말로 진정한 문화이며 문명이라는 판단을 하였다. 이와 더불어 제국주의 침탈에 맞서는 가장 유일한 방법은 과거로부터 전승된 문화유산으로서의 민족적 전통을 지키는 길임을 주장하려 하였다.

 

과연 시인의 이러한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식민 통치자들이 한반도의 식민지 경영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한국인의 민족문화와 그 전통의 고수로 판단하고 식민지 후반기에 이르러 민족적 전통과 전승된 민족문화의 말살에 총력을 기울였다. 실제로 당시의 식민 통치자들은 한국인의 민족문화와 그 전통이 지니는 권위를 일제 관학자들의 의도된 조작과 기획에 의하여 근본을 손상하고 왜곡시키려 하였다. 연구 담당 주체의 정치적 의도가 이러한 변질과 왜곡을 조장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식민지 피지배 민중으로서의 한국인 집단과 공동체가 내부적, 외부적으로 위기에 빠졌을 때 한국인의 전통이 혹시라도 일본인에 대한 우월감이나 배타적 감정을 갖게 되는 결과를 가장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일제 어용학자들은 한국인의 민족적 전통을 약화시켜 편협한 지역 근성과 열등감으로 빠져들도록 하는 각종 연구를 수행하였다. 이 시기에 일제 어용학자들에 의해 발간된 한국인의 전통문화에 대한 각종 연구 자료들을 대상으로 본격적 비판과 수정 작업이 활발하게 펼쳐져야 한다. 사실상 우리는 그동안 이런 자료들에 대하여 묵시적 수용으로 일관해 왔던 점을 따갑게 반성해야만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다시금 되짚어볼 때 백석 시인의 활동에 대한 박용철의 비평적 해설은 현재까지 제출된 백석 작품의 여러 평가 자료들 가운데 가장 탁월했다. 박용철은 백석의 시 세계를 "전반적으로 침식받고 있는 조선어에 대한 혼혈 작용 앞에서 민족의 순수를 지키려는 의식적 반발의 표시"로 읽어 내었다. 백석의 시 작품에서 끝까지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제국주의에 관한 시인의 인식이다. 문명과 반문명이라는 대립항에서 일제가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문명이야말로 가장 극단적이고 전형적인 반문명이라는 점을 백석 시인은 강조하고자 하였다. 이와 더불어 한국인의 문화적 전통이야말로 상대적 제국주의 문화를 압도하고 진정한 문명으로 나아가는 길이었음을 시인은 작품을 통해 역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백석이 자신의 시 작품을 통하여 한국인의 민족적 전통을 특히 중요하게 다룬 까닭은 무엇인가?

백석 시인은 문학작품 속에 무르녹아 있는 그 나라 민족의 전통적인 습속과 언어의 고유성을 매우 중시하였다. 백석이 활동하던 시기가 주로 식민지 시대였는데 제국주의 통치자들은 한국인의 토착문화와 전통을 유린, 파괴, 말살하려 하였다. 이것은 오로지 한국인의 일본인화를 위한 정략적 계획의 일환이었다. 내선일체, 일심동화 따위의 명분들에 은폐된 것이 바로 이러한 속셈이었다. 백석 시인은 이러한 문화 침탈에 맞서 대응하는 가장 적절한 방식이 한국인의 민족적 전통을 끝까지 지켜가는 길이라 판단하였다. 한국인의 방언, 지역적 관습, 아동 유희, 민간 의약, 식생활 습관, 민속 자료들은 모두 백석 시의 중요한 모티프가 되었다.

2.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한국을 식민지로 경영하면서 한국인의 민족적 전통을 유린 말살하려 했던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 조사해 보라.

 

식민 통치자들에 의한 문화 파괴 공작으로 가장 먼저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전래 관습의 파괴이다. 다음으로는 언어의 파괴와 부정이다. 전통적인 마을 공동체 놀이를 완전히 해체 분리시킴으로써 민족적 구심점 상실로 이어지도록 하였고, 한국어를 파괴 부정함으로써 동화 정책의 편의성을 추구하려 하였다. 조선어학회 사건, 조선말 상용 금지, 창씨개명 따위의 악랄한 정책의 강행에서 그러한 구체적 사례를 들 수 있다.

3. 분단시대 우리 문학사에는 백석의 경우처럼 '분단'이라는 태풍과 산사태에 매몰되어 여전히 파묻힌 채로 버려 둔 문학인들이 아직도 많다. 우리는 이러한 자료에 대하여 과연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

 

우선 지속적인 전집 발간 사업을 펼쳐 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관계 학자, 비평가들의 노력뿐만 아니라 전문 출판인들의 이해와 협조가 필요하다. 분단 시대의 매몰 문학인들에 대한 관심은 해금 이후 너무나 반짝 관심으로 일어났다가 중단되었다.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이다. 분단 직전에 월북한 문학인뿐만 아니라 분단 이후의 북한 문학 자료까지도 정리 발간해 가려는 줄기찬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통일 시대 이후의 민족 문학사를 올바르게 수립해 가는 발판이 될 것이다.

추천할 만한 텍스트

『백석 시 전집』, 이동순 엮음, 창작과비평사, 1987.
『백석 전집』, 김재용 엮음, 실천문학사, 1997.
『원본 백석 시집』, 이숭원 주해·이지나 엮음, 깊은샘, 2006.

 

각주

  • 1) 백석의 시에 나타난 아동 유희와 각종 의식, 의례, 행사들의 사례는 대략 25종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백석의 기 - 문명과 반문명에 관한 시적 담론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2006. 9. 18., 휴머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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