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해국(海菊)
김명기 (1969~)
모든 꽃이 질 즈음 해국이 핀다
비탈진 해안가에 가장 늦게까지 피어 있는 꽃
어느 산간에는 벌써 눈이 왔다는데
위태로운 꽃 위로 그칠 줄 모르고 비가 내린다
자기 몸의 몇 배나 되는 짐을 짊어진 채
샌들을 신고 히말라야 기슭을 오르는
어린 소년의 반짝이는 눈망울이 깜박일 때
동상 걸린 발가락 넷을 잘라낸 아버지는
눈 덮인 마당을 절룩절룩 걸어 다니며
아내가 숨긴 술병을 찾고 있지
몹쓸 산기슭이나 대물림한 병든
아비가 술잔에 눈물을 부딪칠 때
가파른 계곡을 겨우 올라가는 어린 눈망울과
몇 번이나 기워 신은 해진 샌들 사이
갈라진 뒤꿈치가 딛고 가는 발자국처럼
그늘진 비탈에서 비탈로 해국이 번지는 동안
벗어날 수도 없는 생을 껴안은 세상 속으로
속수무책 비가 내리네 눈이 내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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