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균 33

함허동천에서 오래 서성이다

함허동천에서 오래 서성이다 전동균 으슬으슬한 저녁답,가랑잎 부서지는 소리가 자꾸 발밑에서 들렸네 어두워지기 전에 강물은 푸른 회초리처럼 휘어졌다가 흉터 많은 내 이마를 후려치고, 아까보다는 훨씬 더 깊어져 불빛도 안 켜진 사람의 마을 쪽으로 그렁그렁 흘러갔네 ―내 눈에는 왜 모래알이 서걱이는지 몰라, 눈을 뜰 때마다 눈 못 뜨게 매운 연기가 어디서 차오르는지 몰라, 잘못 살아왔다고, 너무 아프게 자책하지 말라고 갈 곳 없는 새들은 물에 잠긴 옛집 나무 그림자를 흔들며 석유곤로에 냄비밥을 안치는 獨居의 마음속으로 떼지어 날아들고 아무것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녁답, 나는 집에 안 가려 떼를 쓰는 새끼염소나 달래면서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세계사, 2002.

전동균 2017.09.10

주먹눈

주먹눈 전동균 눈 내리는 밤, 야근을 하고 들어온 중년의 시인이 불도 안 땐 구석방에 웅크리고 앉아 시를 쓰는 밤, CT를 찍어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편두통에 시달리며 그래도 첫마음은 잊지 말자고 또박또박 백지 위에 만년필로 쓰는 밤, 어둡고 흐린 그림자들 추억처럼 지나가는 창문을 때리며 퍼붓는 주먹눈, 눈발 속에 소주병을 든 金宗三이 걸어와 불쑥, 언 손을 내민다 어 추워, 오늘 같은 밤에 무슨 빌어먹을 짓이야, 술 한잔하고 뒷산 지붕도 없는 까치집에 나뭇잎이라도 몇 장 덮어줘, 그게 시야!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 」세계사, 2002.

전동균 2017.09.10

우두커니 서 있는

우두커니 서 있는 전동균 내 그림자 속을 혼자 걸어가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림자 속 세상은 하염없이 넓고 깊어서 장님처럼 길을 잃고 우두커니 서 있는 시간도 많아졌다 오랫동안 모시던 어머니 떠나가신 뒤 밤이면 작고 메마른 손 하나 허공에서 내려와 내 심장을 쥐어짜듯 움켜쥐고, 늙고 서러운 아버지의 몸은 마침내 온몸으로 암종을 터뜨리고 점점 차가워지는 바람이 묻는다 바람의 깃에 몸을 매달고 먼 곳으로 떠나는 새들이, 그들의 빈 둥지가 내게 묻는다 무슨 죄 많아 늘 고개 숙여 걷는가? 걷다가 문득 멈추어 서서, 뭘 그리 보고 있는가? 너에게도…… 영혼이란 게…… 있는가? — 「거룩한 허기」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2.

전동균 2017.09.10

겉장이 나달나달했다

겉장이 나달나달했다 전동균 말기 췌장암 선고를 받고도 괜찮다, 내사 마, 살 만큼 살았데이, 돌아앉아 안경 한 번 쓰윽 닦으시고는 디스 담배 피워 물던 아버지, 병원에 입원하신 뒤 항암 치료도 거부하고 모르핀만, 모르핀만 맞으셨는데 간성 혼수*에 빠질 때는 링거 줄을 뽑아 던지며 살려달라고, 서울 큰 병원에 옮겨달라고 울부짖으셨는데, 한 달 반 만에 참나무 둥치 같은 몸이 새뼈마냥 삭아 내렸는데, 어느 날 모처럼 죽 한 그릇 다 비우시더니, 남몰래 영안실에 내려갔다 오시더니 손짓으로 날 불러, 젖은 침대 시트 밑에서 더듬더듬 무얼 하나 꺼내 주시는 거였다 장례비가 든 적금통장이었다 ---------------- *간성(肝性) 혼수 : 간이 해독 작용을 못해서 암환자들이 겪는 발작, 혼수상태.

전동균 2017.09.10

서리가 내렸다

서리가 내렸다 전동균 때 이른 한파 몰아쳐 마가목 나무 밑에 찍힌 새 발자국 하얗게 얼어붙은 아침 살과 뼈를 태우고 핏속의 암종도 다 태우고 반 평 흙집에 홀로 계신 아버지 얼마나 추우시랴, 그곳은 진로소주도 없을 테니 황태국에 밥 말아 먹다가 무언가에 떠밀리듯 숟가락 떨어뜨리고 아버지 계신 쪽으로 슬쩍, 더운 국밥 그릇을 옮겨놓는 아침 — 「거룩한 허기」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2.

전동균 2017.09.10

얼음폭포 근처

얼음폭포 근처 전동균 눈 맞으며 서서 죽는 나무들을 보았네 한겨울 가리왕산 얼음폭포 근처 어떤 나무들은 무릎 꿇고 얼어붙은 땅에 더운 숨을 불어넣듯 맨얼굴 부비고 있었네 얼마나 더 싸우고 얼마나 더 가난해져야 지복(至福)의 저 풍경 속에 가 닿을 수 있을지 나는 신발 끈을 묶는 척 돌아서서 눈물 훔치고는 이빨을 꽉 물고 내려왔네 빈방에 속옷 빨래들이 널려 있는 사람들의 세상으로 — 「거룩한 허기」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2.

전동균 2017.09.10

까막눈 하느님

까막눈 하느님 전동균 해도 안 뜬 새벽부터 산비탈 밭에 나와 이슬 털며 깨단 묶는 회촌마을 강씨 영감, 성경 한 줄 못 읽는 까막눈이지만 주일이면 새 옷 갈아입고 경운기 몰고 시오리 밖 흥업공소에 미사 드리러 간다네 꾸벅꾸벅 졸다 깨다 미사 끝나면 사거리 옴팍집 손두부 막걸리를 하느님께 올린다네 아직은 쓸 만한 몸뚱아리 농투성이 하느님께 한 잔, 만득이 외아들 시퍼런 못물 속으로 데리고 간 똥강아지 하느님께 한 잔, 모 심을 땐 참꽃 같고 추수할 땐 개좆 같은 세상에게도 한 잔…… 그러다가 투덜투덜 투덜대는 경운기 짐칸에 실려 돌아온다네

전동균 2017.09.10

밥 전동균 6.25동란 중 아버지가 납북된 경상도 상주 땅 어느 집에서는 아침저녁 끼때가 되면 꼭 밥상 위에 아버지의 밥그릇을 올려두었다는데 아이들이 방문을 활짝 열고 “아부지 진지 드시이소” 큰 소리로 외쳤다고 하는데* 갓 젖을 뗀 막내부터 수염 거뭇거뭇한 큰아이까지 때로는 울먹이며 한마음으로 입을 모아 생사 불명의 아버지를 밥상에 모신 뒤에야 차례차례 얼굴이 비치는 희멀건 죽사발에 숟가락을 꽂았다고 하는데 시가 본디 만물을 제자리에 모시는 간절한 그리움의 말씀이라면 조석(朝夕)으로 밥상 위에 놓이던 주인 없는 밥그릇 하나, 천지사방에 종적 없는 아버지를 찾아 부르던 그 막막하고 애절한 목소리야말로 시 아니겠는가 시가 영원히 먹고살아야 할 밥이 아니겠는가 ------------------- *박두연 여..

전동균 2017.09.10

멩동에서 온 전화

멩동에서 온 전화 전동균 ……요새 고기 없니더 달랑, 눈만 달린 호박씨만 나오니더 어제 시청 김 계장, 와, 거, 벌초 때도 낚싯대 들고 오는 양반, 세 칸대 네 칸대 외바늘로 딱, 딱 수초 구멍에 때리 넣는데 참말 기가 막힙디더 그래도 꽝쳤심더 1급수 멩동지 옛말 됐니더 4짜 붕어 인터넷에 뜬 뒤에 벌떼 같은 릴 부대 원자탄에 물이 죽었심더 못물도 생물(生物)이고 고기도 생물인데, 사람처럼 숨을 쉬야 되는데, 수초도 시커멓게 썩어갑니더 맞심더, 재작년 이맘때믄 못물로 밥했지예 하룻밤 낚시에 금물 뚝뚝 지는 토종 붕어 열댓 수는 안 했능교 인자 끝났니더 오늘 내일 고랑고랑 카는 노친네 세상 뜨믄 나도 뜰 낍니더 사십 평생 노 젓고 그물 쳐서 동생들 핵교 다 보냈으이 여한은 없심더 …… 아이라, 아이시더,..

전동균 2017.09.10

음(陰) 유월

음(陰) 유월 전동균 쏴아 쏴아 오후 세시에서 네시 사이로 부는 바람 동막 바다 파도 소리를 내며 바람이 불어와도 숨 멎은 듯 흔들리지 않는 시퍼런 이파리들 속에 오래전 죽은 이들의 얼굴이 햇빛처럼 타오르고 계곡 나무 그늘 아래 쉬고 있는 늙은 여자들은 땅속 깊은 뿌리의 세상에서 잠시 외출 나온 듯 아무 말이 없다 길을 잘못 들었을까, 아니면 내 생의 지도가 파본이었을까 정수사를 지났다는데 정수사를 본 적 없다 — 「거룩한 허기」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

전동균 2017.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