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허동천에서 오래 서성이다 전동균 으슬으슬한 저녁답,가랑잎 부서지는 소리가 자꾸 발밑에서 들렸네 어두워지기 전에 강물은 푸른 회초리처럼 휘어졌다가 흉터 많은 내 이마를 후려치고, 아까보다는 훨씬 더 깊어져 불빛도 안 켜진 사람의 마을 쪽으로 그렁그렁 흘러갔네 ―내 눈에는 왜 모래알이 서걱이는지 몰라, 눈을 뜰 때마다 눈 못 뜨게 매운 연기가 어디서 차오르는지 몰라, 잘못 살아왔다고, 너무 아프게 자책하지 말라고 갈 곳 없는 새들은 물에 잠긴 옛집 나무 그림자를 흔들며 석유곤로에 냄비밥을 안치는 獨居의 마음속으로 떼지어 날아들고 아무것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녁답, 나는 집에 안 가려 떼를 쓰는 새끼염소나 달래면서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세계사,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