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대식 29

오리

오리 우대식 (1965~ ) 오리만 더 걸으면 복사꽃 필 것 같은 좁다란 오솔길이 있고, 한 오리만 더 가면 술누룩 박꽃처럼 피던 향이 박힌 성황당나무 등걸이 보인다 그곳에서 다시 오리, 봄이 거기 서 있을 것이다 오리만 가면 반달처럼 다사로운 무덤이 하나 있고 햇살에 겨운 종다리도 두메 위에 앉았고 오리만 가면 오리만 더 가면 어머니, 찔레꽃처럼 하얗게 서 계실 것이다 --《현대시학》1999. 9월호 등단시

우대식 2022.03.13

정선 아라리, 당신

정선 아라리, 당신 우대식(1965~ ) 마음의 회랑 안쪽에 긴 휘장을 친다 다시 비가 내리고 또 눈이 내린다 그 휘장 아래를 걸으면 밑도 없는 물길, 끝도 없는 산길이 나타나고 사라지고 내 슬픔이 무엔가 생각할 즈음 당신에 대해 생각한다 왜 그렇게 천천히 굽이굽이 적막강산에 서 있는가 비는 여전히 내리고 긴 휘장에 앉아 한 마리 짐승처럼 온몸을 웅크린 채 소금 사러 가던 먼 길과 석탄으로 몸을 씻던 내[川]와 그런 길과 그런 내에서 당신을 기다리던 배가 고팠던 저녁 당신,

우대식 2021.11.18

신폭(神瀑)에 들다

신폭(神瀑)에 들다 우대식 윈난성 신폭 아래 객잔에 들었다 숯불을 피우고 당신이 오기를 기다렸다 쿵쿵 발자국 소리가 들렸지만 먼 당신은 가끔 눈사태만 엽서처럼 보냈을 뿐 흔적이 없다 떡을 떼어 객잔의 창으로 흐르는 눈발에 섞어 먹었다 반야의 밤에 달이 떠오르면 야크의 젖통은 부풀어 신의 나라에서 온 것 같은 울음소리를 냈다 아무것도 나를 지우거나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붉은 숯불이 잦아든다 국경 아래 뜬 달이 조금씩 기울면서 그 아래를 걷는 당신의 모습이 보인 듯도 했다 환상 속의 당신 그대 어깨가 붉어진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무명도 무명의 다함도 없다는 설산 국경에서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당신을 기다리던 한 생(生)이 있다 ―『설산국경』중앙북스, 2013.

우대식 2018.12.10

아버지의 쌀

아버지의 쌀 우대식 아버지가 쌀을 씻는다 쌀 속에 검은 쌀벌레 바구미가 떴다 어미 잃은 것들은 저렇듯 죽음에 가깝다 맑은 물에 몇 번이고 씻다 보면 쌀뜨물도 맑아진다 석유곤로 위에서 냄비가 부르르 부르르 떨고 나면 흰 쌀밥이 된다 아버지는 밥을 푼다 꾹꾹 눌러 도시락을 싼다 빛나는 밥 알갱이를 보며 나는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다 죽어도 잊지는 않으리 털이 숭숭 난 손으로 씻던 그, 하, 얀, 쌀 ―『설산국경』중앙북스, 2013.

우대식 2018.12.10

마방(馬幇)

마방(馬幇) 우대식 차마고도로 가겠다 호수 곁으로 난 길, 맑고도 먼 하늘에 걸린 쓸쓸하고 날이 선 낮달 하나 한번은 차마고도를 걷는 마방으로 살겠다 수염에 고드름을 단 채 허공의 길을 걷겠다 야크 목에 달린 종소리처럼 하나의 파문이 되어 눈 속을 헤치겠다 거대하고 깜깜한 산을 마주하고 지상에 불을 지펴 두 개 빛나는 눈동자로 경(經)을 읊겠다 나와 나 아닌 것들을 만나 화톳불에 붉은 손을 내밀고 잠을 청하겠다 끝도 없는 잠 속에서 뚝, 한 방울 눈물을 남긴 채 지상으로부터 사라지겠다 ―『설산국경』중앙북스, 2013.

우대식 2018.12.10

시(詩)

시(詩) 우대식 시는 나를 일찍 떠난 어머니였으며 왜소했던 아버지의 그림자였으며 쓸쓸한 내 성기를 쓰다듬어주던 늙은 창녀였으며 머리에 흐르던 고름을 짜주던 시골 보건소 선생이었다 시는 마당가에 날리는 재[灰]였으며 길을 잃고 강물 따라 흐르는 밀짚모자였다 폭풍전야, 풀을 뜯는 개였으며 탱자나무 가시 아래 모인 새이기도 하였다 늘 피가 모자라 어지러워하던 한 소년이 주먹을 힘껏 모았다 펴면 가늘게 떨리는 정맥 그곳에 시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설산국경』중앙북스, 2013.

우대식 2018.12.10

안빈낙도를 폐하며

안빈낙도를 폐하며 우대식 사람에 의지하지 마라 이제 오십이 넘었으니 안빈의 도와 같은 것도 필요없다 안(安)도 그렇지만 빈(貧)도 모두 하찮다 당연히 그러할 것이니 자연으로 돌아갈 필요는 더욱 없다 고물상과 폐차장이 널려 있으면 어떠한가 걸어서 물에 도달하면 좋겠지만 아스팔트를 뚫고 핀 들꽃 한 송이면 또 어떠한가 내 몸은 나도 잘 모르는 문명의 회로이다 한 손에는 파리채 한 손에는 담배를 꼬나물고 날것들이나 물리치면서 시를 생각하는 일 하루에 두 줄 정도 쓰는 일 사람에 의지하지 마라 눈꼽 낀 눈으로 먼 태풍을 응시하다가 생각이 부산해질 때 발바닥에 무늬를 새겨 넣을 뿐 그 족적(足跡)의 힘으로 천리도 가고 만리도 갈 뿐 -- 『베두인의 물방울』 여우난골, 2021.

우대식 2018.12.10

겨울 나그네

겨울 나그네 우대식 너구리 한 마리가 절뚝거리며 논길을 걸어가다, 멈칫 나를 보고 선다 내가 걷는 만큼 그도 걷는다 그 평행의 보폭 가운데 외로운 영혼의 고단한 투신이 고여있다. 어디론가 투신하려는 절대의 흔들림 해거름에 그는 일생일대의 큰 싸움을 시작하는 중이다 시골 개들은 이빨을 세우며 무리진다 넘어서지 말아야할 어떠한 경계가 있음을 서로 잘 알고 있다 직감이다 그가 털을 세운다 걸음을 멈추고 적들을 오랫동안 응시한다 나도 안다 지구의 한 켠을 걸어가는 겨울 나그네가 어디로 갈 것인지를 나도 안다 이 싸움이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우대식 2016.0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