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대식 29

유배(流配)

유배(流配) 우대식 오늘날에도 유배라는 것이 있어 어느 먼 섬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는 형벌을 받았으면 좋겠네 컴퓨터도 없고 핸드폰도 빼앗겨 누구에겐가 온 편지를 읽고 또 읽고 지난 신문 한 쪼가리도 아껴 읽으며 탱자나무 울타리 속에 웅크리고 앉아 먼 바다의 불빛을 오래 바라보고 싶네 마른 반찬을 보내 달라고 집에 편지를 쓰고 살뜰한 마음으로 아이들의 교육을 걱정하며 기약 없는 사랑에 대해 논(論)을 쓰겠네 서슬 위에 발을 대고 살면서 이 먼 위리와 안치에 대해 슬픈 변명을 쓰겠네 마음을 주저앉히고 서로 다른 신념을 지켜보는 갸륵함을 염원하다 보면 염전의 새벽에 어둑한 불이 들어오겠네 바닷가의 수척한 노동과 버려진 자의 곤고함을 배우다 문득 얼굴에 새겨진 주홍글씨를 물속에서 발견하면 삼박 사일을 목 놓아..

우대식 2022.09.07

시(詩)

시(詩) 우대식 음악 아닌 것으로 음악하기 나인 것을 나 아닌 척하기 가을날 듣는 만가(輓歌) 겨울날 곁불을 옆에 두고 옹송거리며 마시는 낮술 사람은 거리를 두고 그림자 사랑하기 집 떠난 모든 이들의 이름을 불러보기 그리워하다가 다시는 생각하지 않기 집 떠난 모든 이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보기 악다구니로 떼쓰며 울다가 아무 보는 이 없을 때는 슬그머니 일어나 옷 털기 꾀죄죄한 민낯으로 설산(雪山)에 대적하기 눈이 멀어도 먼 것을 모르고 형형색색 달콤하게 이야기하기 신을 실컷 조롱하다가 그 발아래 한없이 통곡하기 영원한 것이 있나요 이런 물음으로 모든 것을 탕진한 나그네처럼 우물가에 오래 앉아 있기 아주 오래도록 허공을 응시하다가 저 푸른 한 점으로 쑥 들어가기 --《시와 시학》 2018년 봄호 --『베두인..

우대식 2022.09.06

빗살무늬 상처에 대한 보고서

빗살무늬 상처에 대한 보고서 우대식 아내의 가슴에서 못 자국 두 개와 일곱 개 선명한 선이 발견되었다 못 자국 두 개의 출처는 내 분명히 알거니 빗살무늬 상처는 진정 알지 못한다 말도 없이 집을 나가 해변에서 보낸 나날들의 기록인가 생각해보았다 혹 주막에서 보낸 내 생을 일이 년 단위로 가슴 깊이 간직한 탓이라고도 생각해보았다 매일매일 생의 싸움터를 헤매인 것은 나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왜 저의 가슴에 저토록 선명한 상처의 보고서가 남아 있는가 나 바다에서 죽음을 꿈꾸었을때 그는 지상에서 죽어갔던 것

우대식 2022.09.05

꽃의 북쪽

꽃의 북쪽 우대식 개구리도 겨울잠에 들고 싸락눈이 내리는 밤 마쓰오 바쇼, 이런 날은 늘 바람이 창호 문을 두드렸지 화로에 술을 데우도록 하지 낡은 신발은 방 안 머리맡에 놓아두도록 하지 왜 마음이란 천리만리 달아나는 것인지 조금은 뜨거운 술을 천천히 내장에 붓고 매화나 동백 같은 꽃을 기다리기로 하지 아니면 꽃의 북쪽으로 달아날까 신음처럼 그대가 내게 물을 때 절망의 심줄을 활시위처럼 당겨 심장 가장 먼 뒤쪽으로 모든 생각을 모으곤 하지 마쓰오 바쇼, 조금 추워도 되겠지 유여한 봄빛이 마루 구석 쌀통에 넘칠 즈음이면 안개와 연기는 강줄기를 따라 무진무진 흐르겠지 그대와 나도 이쯤에서 안녕이지 연기를 좋아하는 나와 안개를 좋아하는 당신 바람이 올 때까지만 지상에 기대기로 하지 이쯤에서 안녕이지 -- 『베..

우대식 2022.09.04

마리아를 위한 변명-시론

마리아를 위한 변명--시론 우대식 마리아 당신은 내 유일한 저쪽이다 모래바람이 당신의 한쪽 얼굴을 쓸고 갈 때 태양은 당신의 방향으로 기울고 있다 맑고 찬 우물에 충충히 번지는 양의 핏물처럼 광야의 밤이 찾아온다 짐승의 울음소리가 떠도는 밤이다 태초에 있었던 당신 마리아라고 부를 때마다 쌓여가는 그리움의 두께를 느낀다 가까스로 살아 당신을 배경으로 오래전 인화된 사진처럼 낡아간다는 사실은 어떤 위로와도 견줄 수 없다 견딜 수 없는 외로움이 있다는 사실도 적어둔다 마리아 서리 내리는 가을 새벽처럼 우리가 좀 더 추운 곳에서 종말을 맞이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물을 긷는 사내가 되어 어떤 골목길에서 당신을 만나는 꿈을 꾼다 조심스레 길을 비킨다 찰랑대는 물통에서 몇 방울의 맑은 물이 당신의 옷자락으..

우대식 2022.09.04

발광의 주파수

발광의 주파수 우대식 단원의 그림 모구양자도(母狗養子圖)를 보다가 눈이 흐려졌다. 어미와 강아지의 눈. 이 그림은 다 지우고 세 개의 눈만 남겨놓아도 좋으리. 어미의 눈은 파철지광(破鐵之光)의 그것이었다. 사람들은 자꾸 인자한 눈빛이라 하는데 내 눈에는 미친 듯한 나선형의 발광으로 보였다. 어린 새끼의 눈이 순진무구라는 것은 동의하겠다. 그러나 어린 새끼를 향한 당당한 미침, 뻗침, 어떤 도발이 어미의 눈동자에 돌고 있었다. 오로지 하나의 생명만을 향한 인자함이 낭자하게 고여 있었다. 생명이 간혹 잔인하도록 모진 이유도 이 눈빛 언저리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발광의 주파수가 희미해질 때 우리는 고아가 된다. -- 『베두인의 물방울』 여우난골, 2021.

우대식 2022.08.06

정선을 떠나며

정선을 떠나며 우대식 ​ 파울첼란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었던가 아름다운 시절은 흩어져 여자의 등에 반짝인다고 시선을 거둔다 운명이란 최종의 것 정선 강가에 밤이 오면 밤하늘에 뜨는 별 나에게 당신은 그러하다 성탄절의 새벽길 눈이 쌓이기 시작하면 기찻길 옆 제재소에서는 낮은 촉수의 등이 켜지고 이미 오래전에 예언한 미래가 사라지는 것들을 받아내고 있다 선명한 모든 것들을 배반하며 산기슭으로 흐르는 눈발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그리는 일은 또 언제나 부질없다 가끔 당신을 생각한다 당신을 생각하며 밥을 먹는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밥을 남긴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사랑이다 --『시와 표현』 2013. 가을호 -- 『베두인의 물방울』 여우난골, 2021.

우대식 2022.03.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