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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어 - 최승호

북어 최승호 밤의 식료품 가게 케케묵은 먼지 속에 죽어서 하루 더 손때 묻고 터무니없이 하루 더 기다리는 북어들, 북어들의 일개 분대가 나란히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나는 죽음이 꿰뚫은 대가리를 말한 셈이다. 한 쾌의 혀가 자갈처럼 죄다 딱딱했다. 나는 말의 변비증을 앓는 사람들과 무덤 속의 벙어리를 말한 셈이다. 말라붙고 짜부라진 눈, 북어들의 빳빳한 지느러미. 막대기 같은 생각 빛나지 않는 막대기 같은 사람들이 가슴에 싱싱한 지느러미를 달고 헤엄쳐 갈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닷없이 북어들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거봐,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너도 북어지 귀가 먹먹하도록 부르짖고 있었다. ―『대설주의보』민음사 --------------------------------- 최승호..

내가 읽은 시 2015.11.16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김사인 나의 옛 흙들은 어디로 갔을까 땡볕 아래서도 촉촉하던 그 마당과 길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개울은, 따갑게 익던 자갈들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앞산은, 밤이면 굴러다니던 도깨비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런닝구와 파자마 바람으로도 의젓하던 옛 동네어른들은 어디로 갔을까 누님들, 수국 같던 웃음 많던 나의 옛 누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배고픔들은 어디로 갔을까 설익은 가지의 그 비린내는 어디로 갔을까 시름 많던 나의 옛 젊은 어머니는 나의 옛 형님들은, 그 딴딴한 장딴지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나의 옛 비석치기와 구슬치기는, 등줄기를 후려치던 빗자루는, 나의 옛 아버지의 힘센 팔뚝은, 고소해하던 옆집 가시내는 어디로 갔을까 나의 옛 무덤들은, 흰머리 할미꽃과 사금파리 살림..

김사인 2015.11.16

소쩍새 울다 - 이면우

소쩍새 울다 이면우 저 새는 어제의 인연을 못 잊어 우는 거다 아니다, 새들은 새 만남을 위해 운다 우리 이렇게 살다가, 누구 하나 먼저 가면 잊자고 서둘러 잊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 아니다 아니다 중년 내외 두런두런 속말 주고 받던 호숫가 외딴 오두막 조팝나무 흰 등 넌지시 조선문 창호지 밝히던 밤 잊는다 소쩍 못 잊는다 소소쩍 문풍지 떨던 밤.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창비, 2001.

내가 읽은 시 2015.11.16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백석 2015.11.15

흰 바람벽이 있어

흰 바람벽이 있어 백 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 셔츠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 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굿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

백석 2015.11.15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출출이 - 뱁새 마가리 - 오막살이 고조곤히 - 고요하게 ● 백..

백석 2015.11.15

무릎 꿇다

무릎 꿇다 김사인 뭔가 잃은 듯 허전한 계절입니다. 나무와 흙과 바람이 잘 말라 까슬합니다. 죽기 좋은 날이구나 옛 어른들처럼 찬탄하고 싶습니다. 방천에 넌 광목처럼 못다 한 욕망들도 잘 바래겠습니다. 고요한 곳으로 가 무릎 꿇고 싶습니다. 흘러온 철부지의 삶을 뉘우치고 마른 나뭇잎 곁에서 죄 되지 않는 무엇으로 있고 싶습니다 저무는 일의 저 무욕 고개 숙이는 능선과 풀잎들 곁에서. 별이 총총해질 때까지

김사인 2015.11.15

고비사막 어머니

고비사막 어머니 김사인 1 잘 가셨을라나. 길 떠나신지 벌써 다섯해 고개 하나 넘으며 뼈 한자루 내주고 물 하나 건너면서 살 한줌 덜어주며 이제 그곳에 닿으셨을라나. 흙으로 물로 바람으로 살과 뼈 터럭들 제 갈 길로 보내고 당신만 남아 잠시 호젓하다가 아니, 아무것도 아닌 이게 뭐지, 화들짝 놀라시다가 그 순간 남은 공부 다 이루어 높이 오른 연기처럼 문득 흩어지셨을까. 2 어디 가 계신가요 어머니. 이렇게 오래 전화도 안 받으시고 오늘 저녁에는 돌아오세요. 콩국수를 만들어주세요. 수박도 좀 잘라주시고 제 몫으로 아껴둔 머루술도 한잔 걸러주세요. 술 잘하는 아들 대견해하며, 당신도 곁에 앉아 찻숟갈로 맛보세요 나는 이렇게만 해도 취한다 하시며. 어머니, 머리도 좀 만져봐주세요 손도 좀 잡아주세요 그래, ..

김사인 2015.11.15

좌탈(坐脫)

좌탈(坐脫) 김사인 때가 되자 그는 가만히 곡기를 끊었다. 물만 조금씩 마시며 속을 비웠다. 깊은 묵상에 들었다. 불필요한 살들이 내리자 눈빛과 피부가 투명해졌다. 하루 한번 인적 드문 시간을 골라 천천히 집 주변을 걸었다. 가끔 한자리에 오래 서 있기도 했다. 먼 데를 보는 듯했다. 저녁별 기우는 초겨울 날을 골라 고요히 몸을 벗었다 신음 한번 없이 갔다. 벗어둔 몸이 이미 정갈했으므로 아무것도 더는 궁금하지 않았다. 개의 몸으로 그는 세상을 다녀갔다.

김사인 2015.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