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오래 만진 슬픔 - 이문재

공산(空山) 2021. 8. 31. 09:49

   오래 만진 슬픔

   이문재

 

   이 슬픔은 오래 만졌다

   지갑처럼 가슴에 지니고 다녀

   따뜻하기까지 하다

   제자리에 다 들어가 있다

   이 불행 또한 오래되었다

   반지처럼 손가락에 끼고 있어

   어떤 때에는 표정이 있는 듯하다

   반짝일 때도 있다

   손때가 묻으면

   낯선 것들 불편한 것들도

   남의 것들 멀리 있는 것들도 다 내 것

   문밖에 벗어놓은 구두가 내 것이듯

   갑자기 찾아온

   이 고통도 오래 매만져야겠다

   주머니에 넣고 손에 익을 때까지

   각진 모서리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리하여 마음 안에 한자리 차지할 때까지

   이 괴로움 오래 다듬어야겠다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를 힘들게 한 것들이

   우리의 힘을 빠지게 한 것들이

   어느덧 우리의 힘이 되지 않았는가

​  혼자의 넓이창비,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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