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숟가락 통사 외 1편 - 이진엽

공산(空山) 2021. 1. 20. 09:47

   숟가락 통사 외 1편

   이진엽

 

 

   숟가락을 바라보며 한국 통사通史를 읽는다

   그곳엔 왕후장상의 하얀 쌀밥이 묻어있는가 하면

   등뼈 굵은 꺾쇠의 등겻가루도 묻어 있다

   사람은 한울 안에 다 사람인데

   은수저 딸각이는 옆에 나무숟갈도 투닥댄다

   지나온 시간들이 저 숟갈에 이끼로 낄 때

   역사의 행간 사이로 밥알이 자꾸 묻어 나온다

   그래 이 밥알,

   고려 분녀의 눈물인가 조선 얼금이의 한숨인가

   뒤돌아보면 우리 역사는

   먼지 낀 책이 아니라 숟가락 속에서 흘러왔다

   청산리와 다부동,

   산비탈 흙 속에 숟갈 하나 남기고 간

   젊은 넋들의 가뿐 숨도 그것에서 묻어나왔다

   저 거울, 오천 년을 비추는 유리창

   은빛 그 숟가락을 한 동안 바라보며

   오늘은 한국 통사를 가슴으로 다 읽었다

 

 

 

   구부러짐에 대한 생각

 

 

   조선 소나무 숲속을 걸어본다

   세상에서 가장 마음 편한 곳

   제 멋대로 구부러져 군락을 이루며 자라온

   아름드리 적송들 사이를 혼자 걸어본다

   삐잇 삐이, 작은 멧새소리를 내는 청솔바람

   마음 속 쇠꼬챙이도

   어느새 풀대같이 부드럽게 휘어버린다

   하늘의 발을 찌르는 무수한 수직들

   그 위태로운 세상의 아픈 예각도

   이 숲에선 명주치마처럼 순하게 접혀버린다

   사각의 머리를 이리저리 부딪치며

   가파른 벽을 맹렬히 기어오르던 사람들

   그들도 이 숲에선 욕망의 모서리를 깎아야 한다

   모든 것이 틀에서 벗어나

   아무렇게나 구부러지는 이곳

   숲의 저 바깥에서 금의 탑을 쌓는 자들은

   이 천년의 몸짓을 알지 못하리

   조선 소나무 숲길을 걸어본다

   지상에서 가장 아늑한 곳

   신발 끈이 조금 풀려도 그냥 마음 편안히

   그 숲에선 눈구나 갈 지之 자로 걸어야 한다

 

 

   -- 이진엽 시인의 대표작(《대구문학》2020 수상작품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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