숟가락 통사 외 1편
이진엽
숟가락을 바라보며 한국 통사通史를 읽는다
그곳엔 왕후장상의 하얀 쌀밥이 묻어있는가 하면
등뼈 굵은 꺾쇠의 등겻가루도 묻어 있다
사람은 한울 안에 다 사람인데
은수저 딸각이는 옆에 나무숟갈도 투닥댄다
지나온 시간들이 저 숟갈에 이끼로 낄 때
역사의 행간 사이로 밥알이 자꾸 묻어 나온다
그래 이 밥알,
고려 분녀의 눈물인가 조선 얼금이의 한숨인가
뒤돌아보면 우리 역사는
먼지 낀 책이 아니라 숟가락 속에서 흘러왔다
청산리와 다부동,
산비탈 흙 속에 숟갈 하나 남기고 간
젊은 넋들의 가뿐 숨도 그것에서 묻어나왔다
저 거울, 오천 년을 비추는 유리창
은빛 그 숟가락을 한 동안 바라보며
오늘은 한국 통사를 가슴으로 다 읽었다
구부러짐에 대한 생각
조선 소나무 숲속을 걸어본다
세상에서 가장 마음 편한 곳
제 멋대로 구부러져 군락을 이루며 자라온
아름드리 적송들 사이를 혼자 걸어본다
삐잇 삐이, 작은 멧새소리를 내는 청솔바람
마음 속 쇠꼬챙이도
어느새 풀대같이 부드럽게 휘어버린다
하늘의 발을 찌르는 무수한 수직들
그 위태로운 세상의 아픈 예각도
이 숲에선 명주치마처럼 순하게 접혀버린다
사각의 머리를 이리저리 부딪치며
가파른 벽을 맹렬히 기어오르던 사람들
그들도 이 숲에선 욕망의 모서리를 깎아야 한다
모든 것이 틀에서 벗어나
아무렇게나 구부러지는 이곳
숲의 저 바깥에서 금의 탑을 쌓는 자들은
이 천년의 몸짓을 알지 못하리
조선 소나무 숲길을 걸어본다
지상에서 가장 아늑한 곳
신발 끈이 조금 풀려도 그냥 마음 편안히
그 숲에선 눈구나 갈 지之 자로 걸어야 한다
-- 이진엽 시인의 대표작(《대구문학》2020 수상작품집)
'내가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얀 성(城) - 강신애 (0) | 2021.01.29 |
---|---|
다시 가을이 옵니다 - 조명선 (0) | 2021.01.21 |
따스한 소통 - 이진엽 (0) | 2021.01.20 |
탑 외 2편 - 이해리 (0) | 2021.01.19 |
도마와 침대 사이 - 조은길 (0) | 2021.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