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 외 2편
이해리
이끼도 끼고 군데군데 금 갔다
꼭대기 층 한 귀퉁이는 떨어져 나갔다
떨어져 나간 곳을 푸른 하늘이 채우고 있다
도굴과 훼손과 유기의 질곡을
온몸으로 받들고도 꼿꼿이 서 있는 것은
견디는 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견딤으로 공을 들인 몸은 좀 깨지기도 해야 아름다웠다
고난의 상흔도 보여야 미더웠다
언제부턴가 온전한 것이 외려 미완이란 생각이 든다
깨진 곳을 문질러 가슴에 갖다 대면
온몸에서 수런거리는 상처들
이루어지는 것 드물어도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 가슴 층층에 쌓여
바람 부는 폐사지에 낡아가고 있다면
당신도 나도 다 탑이다
섬
바닷물 갈라져
길이 나는 시간을
물때라 한다
물도 때가 돼야
들어오고 나가니
무엇이든 때를 만나야
길이 나는 법이다
생이란 어차피
때를 기다리는 것
기다리다가 마음이
닮아 가는 것
분명히 오고 말 것을
아니 올까 걱정하다가
기어이 가고 말 것을
머물러줄까 조바심하다가
왔는가 하면 떠나버리고
갔는가 하면 다시 와서
출렁이는 파도에 목을 매고
시달리다 가는 것
그대에게 가는 길도 늘
그렇게 열렸다 닫히므로
나는 아직도 섬으로
남아있다
첫눈 내린 수성못에
첫눈 내린 수성못에 낮달이 떴다
썰다 실수한 무조각 같이 얇은 달이
수면에도 한 조각 빠져 있다
어느 먼 북방에서 방금 날아온 가창오리 몇 마리
수성못 첫눈 몇 송이 쪼아먹고 못에 빠진 낮달도
한 조각 살짝 맛 본 후
이번 겨울은
여기 눌러살 작정을 한다
-- 2020 대구문학상 수상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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