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탑 외 2편 - 이해리

공산(空山) 2021. 1. 19. 17:43

   탑 외 2편

   이해리

 

 

   이끼도 끼고 군데군데 금 갔다

   꼭대기 층 한 귀퉁이는 떨어져 나갔다

   떨어져 나간 곳을 푸른 하늘이 채우고 있다

   도굴과 훼손과 유기의 질곡을

   온몸으로 받들고도 꼿꼿이 서 있는 것은

   견디는 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견딤으로 공을 들인 몸은 좀 깨지기도 해야 아름다웠다

   고난의 상흔도 보여야 미더웠다

   언제부턴가 온전한 것이 외려 미완이란 생각이 든다

   깨진 곳을 문질러 가슴에 갖다 대면

   온몸에서 수런거리는 상처들

   이루어지는 것 드물어도

   무너뜨릴 수 없는 것이 가슴 층층에 쌓여

   바람 부는 폐사지에 낡아가고 있다면

   당신도 나도 다 탑이다

 

 

 

   섬

 

 

   바닷물 갈라져

   길이 나는 시간을

   물때라 한다

 

   물도 때가 돼야

   들어오고 나가니

   무엇이든 때를 만나야

   길이 나는 법이다

 

   생이란 어차피

   때를 기다리는 것

   기다리다가 마음이

   닮아 가는 것

 

   분명히 오고 말 것을

   아니 올까 걱정하다가

   기어이 가고 말 것을

   머물러줄까 조바심하다가

 

   왔는가 하면 떠나버리고

   갔는가 하면 다시 와서

   출렁이는 파도에 목을 매고

   시달리다 가는 것

 

   그대에게 가는 길도 늘

   그렇게 열렸다 닫히므로

   나는 아직도 섬으로

   남아있다

 

 

 

   첫눈 내린 수성못에

 

 

   첫눈 내린 수성못에 낮달이 떴다

   썰다 실수한 무조각 같이 얇은 달이

   수면에도 한 조각 빠져 있다

   어느 먼 북방에서 방금 날아온 가창오리 몇 마리

   수성못 첫눈 몇 송이 쪼아먹고 못에 빠진 낮달도

   한 조각 살짝 맛 본 후

   이번 겨울은

   여기 눌러살 작정을 한다

 

 

   -- 2020 대구문학상 수상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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