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 - 김영태 설경(雪景) 김영태 우리 눈 높이 위에 있는 음악이다 바람이 멎은 후 꽃나무 사이 풍경처럼 삭막한 음악이다 표정만한 가벼운 몸 둘레에 따스한 얼굴 더 소중한 그 무엇을 소망하는 얼굴이다 우리 시야보다 먼데 있는 종소리다 귀를 막고 숨어도 들려오는 종소리다 하여, 이후에 찾아올 몇몇 친구 이미 묘비에 잠든 이 사랑하는 이 모두 한결같이 들려주고 싶은 음악이여 얼굴의 미소여 저 제야의 종소리는 무슨 연유일까 사랑한다는 한 마디의 유언은 내가 읽은 시 2024.09.26
탑동 - 현택훈 탑동 현택훈(1974~ ) 누군 깨진 불빛을 가방에 넣고 누군 젖은 노래를 호주머니에 넣어 여기 방파제에 앉아 있으면 안 돼 십 년도 훌쩍 지나버리거든 그것을 누군 음악이라 부르고 그것을 누군 수평선이라 불러 탑동에선 늘 여름밤 같아 통통거리는 농구공 소리 자전거 바퀴에 묻어 방파제 끝까지 달리면 한 세기가 물빛에 번지는 계절이지 우리가 사는 동안은 여름이잖아 이 열기가 다 식기 전에 말이야 밤마다 한 걸음씩 바다와 가까워진다니까 와, 벌써 노래가 끝났어 신한은행은 언제 옮긴 거야 내가 읽은 시 2024.09.22
서머와인(Summer Wine) - 뚜아에무아, Nancy Sinatra & Lee Hazlewood 썸머와인(번안 가사) 박인희 개사 방울소리 울리는 마차를 타고 콧노래 부르며 님찾아 갔네 하늘엔 흰구름 둥실 떠가고 풀벌레 다정히 우짖는 소리 오오 썸머 와인 따스한 웃음지며 반겨줄 그녀 그리운 고향땅이 저기 보이네 달콤한 포도주를 따라주겠지 입술에 감도는 향기로운 맛 음음 썸머와인 눈부신 태양은 옛과 같지만 그리운 그녀는 간곳이 없네 처량하게 주머니는 텅텅비었고 잊을 길 없어라 달콤한 술 오오 썸머와인 석양을 등에지고 돌아가는 길 쓸쓸한 이내 마음 그 누가 아랴 가슴에 스며드는 갈바람 소리 산새도 목메어 우짖는 마음 음음 썸머와인Summer wine Written by Lee Hazlewood Strawberries, cherries and an angel's kiss in spring My summe.. 트럼펫 악보 2024.09.22
이 장미 한 송이 3년 전에 결혼하여 멀리 사는 둘째 아들 부부는 아내와 나의 생일에 축하 케이크나 꽃바구니를 보내 주곤 하였다. 빵을 좋아하는 나는 케이크가 반가웠지만 꽃바구니에 대해선 마냥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한 뼘도 안 되는 짧은 길이로 잘려서 물먹은 스펀지(플로럴 폼floral form)에 빽빽이 꽂혀 있는 꽃들을 보면 안쓰럽고 부자연스럽고 답답한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사나흘만 지나면 시들어서 한 보따리의 쓰레기가 돼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들 부부에게 앞으론 꽃바구니 같은 건 보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러고 나서 한번은 그 꽃바구니의 장미가 시들기 전에 꽃대가 그중 긴 것 몇 송이를 골라서 꽃은 잘라 버리고 꺾꽂이를 시도해 보았다. 난초 화분에 입자가 고운 적옥토를 채우고, 거기에다 장미 꽃대를.. 텃밭 일기 2024.09.19
허수경의 「공터의 사랑」 감상 - 박준 공터의 사랑 허수경(1964~2018)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혼자 가는 먼 집』1992. --------------------------------------- 태어난 지 200일 무렵부터 아이에게는 영속성이라는 감각이 발달하게 됩니다. 영속성은 대상이 눈앞에서 사라진다고 해서 그것이 없어졌다고 생각하.. 해설시 2024.09.10
정우신의 「메카닉」 감상 - 박소란 메카닉 정우신 삼촌은 기계를 잘 다뤘다 아픈 사람도 기계로 고쳤다 비가 오거나 스님이 시주를 오는 날이면 톱날을 교체하곤 했다 삼촌은 언제 뭉툭해졌더라 몇 번째 톱날이었더라 기계가 삼촌을 오랫동안 만지던 날 우리는 기름이 떠다니는 미숫가루를 마시며 철판을 옮겼다 ―『미분과 달리기』2024.6 ---------------------------------------- 수리공, 기계공 등의 뜻을 지닌 “메카닉(mechanic)”은 속어로 살인 청부업자를 이르기도 한다고. 당연히 시인은 이 모든 의미를 두루 염두에 두고 제목을 지었을 것이다.그런 만큼 시에는 어떤 섬뜩함이 있다. “삼촌은 기계를 잘 다뤘다”로 시작해 “기계가 삼촌을 오랫동안” 만졌다에 이르는 .. 해설시 2024.09.10
조해주의 「밤 산책」 감상 - 나민애 밤 산책 조해주(1993~ ) 저쪽으로 가 볼까 그는 이쪽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얇게 포 뜬 빛이 이마에 한 점 붙어 있다 이파리를 서로의 이마에 번갈아 붙여 가며 나와 그는 나무 아래를 걸어간다 ―『가벼운 선물』 --------------------------------- 만약 이 시인이 화가라면, 이 시가 그림이라면, 나는 이 그림을 꼭 갖고 싶다. 돈을 모으고 낯선 화랑에 가서 ‘이 그림을 살게요’라고 말하고 싶다. 방에 걸어 두고 내 마음에 걸어 둔 듯 바라보고 싶다. 시인이 말하듯 그려 놓은 밤 산책을 나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과 나란히 걷는 그 시간이 나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너무 좋지 않은가. ‘얇게 포 뜬 빛.. 해설시 2024.09.10
서시 - 한강 서시 한 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 내가 읽은 시 2024.09.10
소나기 - 전동균 소나기 전동균(1962~) 노랑멧새들 총알처럼 덤불에 박히고 마루 밑 흰둥이는 귀를 바르르, 갑자기 컴퓨터 화면이 시커메졌다 화악, 입안 가득 차오르는 화약 같은 생흙 냄새 세상이 아픈 자들, 대속(代贖)의 맨발들이 지나간다 내가 읽은 시 2024.09.10
라원이의 대구 첫나들이 태어난 지 1년 반이 된 손녀 라원이가 어제 낮에 난생처음으로 제 부모와 함께 대구에 왔다가 오늘 오후에 남양주로 돌아갔다. 그는 승용차를 타고 멀리 가는 것을 싫어한다고 하는데, 추석 열차표 예매를 놓쳐서 1주일 앞당겨 열차(SRT)를 타고 왔다가 간 것이다. 어제 낮에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승용차를 타고 동대구역으로 마중을 나갔었다. 불로동의 냉면집에서 점심을 함께 먹고 바로 팔공산으로 갔다. 도중에 잠이 든 라원이 할아버지의 고향집인 산가에 도착해서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기다린 후에 뒤쪽의 계곡으로 내려갔다. 더운 날씨라 물은 차지 않았다. 라원이는 얕은 물에 들어가 손발로 물을 튀기며 노는 것을 좋아했다. 이 개울은 내가 어릴 적엔 여남은 명의 마을 아이들이 여름이 되면 살다시피 하던 곳이지만 지.. 텃밭 일기 2024.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