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언어의 선험성
1
인간의 기본구조에 속하는 모든 요소는 앞서 주어진 것이다. 인간이 그것을 취하여 사용하기 이전인 태초부터 이미 인간을 위해 마련되어 있었다. 인간에게 앞서 주어진 것 중 하나는 바로 언어다. 빌헬름 폰 훔볼트는 말했다. "내 확신에 의하면, 언어는 인간 내면에 온전히 저장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 언어의 발명이 수천 년 전 혹은 수만 년 전이라고 추정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인간이 한 단어의 말이라도 진실로 이해하려면, 감각으로 터져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분명한 개념을 전달할 목적으로 발음된 하나의 어휘로 이해하려면, 이미 인간 안에 언어 전체가 체계를 갖추고 자리 잡은 상태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언어는 인간에게 미리 주어져 있다. 인간이 말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언어는 인간 속에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인간은 처음부터 말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 속에 선험적으로 내재하는 언어를 사용해서 말을 하는 것이다.* 선험성은 모든 경험에 우선한다. 선험성은 인간의 외부에서 왔지만 원래부터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 인간은 스스로 움직이면서 그것을 향해 좀 더 다가가기도 하고, 어떨 때는 멀어지기도 한다. 선험성은 신의 의지다. 그것은 인간을 선험적인 것들로부터 멀리 떨어뜨려놓기도 하고 동시에 가까이 끌어당기기도 한다. 그 멀어짐과 끌어당김 사이에서 인간은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다. 선험성에서 멀어졌다가 가까워지는 움직임 속에서 시간이 탄생했다.
언어는 인간에게 앞서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언어에 대해서 자유롭다는 점이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 말해지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언어로 말하기도 한다. 언어에는 이처럼 능동적인 동시에 수동적이고, 강요당하는 동시에 자유로운 두 행위가 모두 하나의 형태로 존재한다. 그것은 인간의 영역보다 더 높은 차원에 속한 것이다. 서로 반대되는 두 성질의 통일성은 언어의 신적인 속성을 증명한다.
선험성은 끊임없이 인간을 말하고 있는 그 무엇과도 같다. 그것이 없다면 모든 개인은 제각각 다른 언어로 말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선험적인 것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말해지며, 침묵할 때는 선험적인 것에 의해서 침묵된다. 그때 인간을 침묵하는 그 침묵은, 인간의 침묵 이상의 침묵이다. 선험적인 것에 의해 침묵되는 것은 하나의 언어이기도 한데, 그것은 인간의 언어 이상의 언어다./ (...)
사르트르의 추종자인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언어가 선험적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했는데, 그 사실은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는 말했다. "인간이 말을 배우기 이전부터 언어는 인간 속에 내재해 있다. 언어는 스스로 가르치며 스스로 해석한다. 이것이 바로 언어가 스스로 발휘하는 기적이다." 태어난 직후에 아이는 동물들이 그러는 것처럼 몸짓과 소리로 의사를 표시하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발생한 몇 개의 어휘가 아이의 입에서 터져나온다. 그 어휘는 더 이상 아이 앞에 놓인 사물들을 가리키는 고립된 분절음이 아니라, 어떤 하나의 전체, 선험적 언어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다. "만약 아이들이 이미 언어를 자신 안에 갖고 있지 않다면, 그들은 언어를 배우지 않을 것이다." (장 파울, 《헤스페루스》) 아이의 언어는 어른의 언어보다 선험성에 더욱 가깝다. 선험성이 아이를 두텁게 둘러싸고 있다. 아이의 말은 선험성의 막을 느리게 투과하여 외부로 나온다. 아이는 온전히 선험성의 영향 아래서 말을 한다. 아이는 선험성 안에 머물며, 선험성은 아이를 언어 속으로 밀어낸다. 아이가 느리게 말하는 것은 언어를 배우는 단계여서가 아니라,아이 자체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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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에는 이러한 초월적인 선험성 이외에도 또 다른 선험성, 즉 인간적 요인에 의한 내재적 선험성이 있다. 그것은 자기 민족의 언어가 세대를 거듭하며 전승될 때 발생한다. 하나의 언어가 오래될수록, 그 언어 속에 깃든 사건과 역사가 쌓일수록, 인간적 요인에 의한 선험성만이 두드러질 위험이 커진다.
〔5〕 말과 빛
1
하나의 단어가 말해지는 곳은 환하게 밝아진다. 환해지리라, 라는 말이 거기에 현존한다. 그 말이 언어로 이해되기도 전에, 먼저 환함이 찾아온다. 희미하게 동이 트고, 뭔가가 지평선 위로 떠오른다. 빛줄기가 어둠을 뚫고 대기를 채운다. 사람들은 사고가 말을 앞서서 진행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앞서 나가는 것은 사고가 아니다. 말이 앞으로 먼저 내보내는 것은 빛이다. 말은 자기 스스로의 빛을 향해 말한다. 말은 빛 속에서 예견된다. 인간은 빛을 향해 말한다. "Loquere ut te videam." 말하라, 내가 너를 보고 있노라고. 말하라, 네가 말을 통해서 빛 속으로 오며, 그런 너를 내가 보고 있노라고.
말의 빛은 말에 앞선 인식을 암시하며, 또한 말에 뒤따르는 인식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 한가운데는 인간의 인식이 있다. 인간은 인식을 통해서 현존한다.
말 속에 깃든 빛은 "소모되지" 않는다. 빛은 말을 단지 소모되기 위해서 태어난 것들 위로 높이 끌어올린다. 말은 빛 속에 머물며 오직 빛과 함께 움직인다. 빛은 역동적이지 않다. 빛은 오직 빛날 뿐이다.
2
말이 없다면, 어둠에 대항하는 것은 하나의 밝음뿐이다. 말로 인하여 밝음은 빛이 된다. 말은 외면적인 밝음을 빛으로 만든다. 인간의 하루는 말의 빛으로 시작된다. 동물에게 하루란 단지 밝은 상태에 지나지 않지만, 인간에게 하루는 빛이다.
빛은 어둠에 대항한다. 하지만 빛이 이런 대항관계에서만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빛은, 어둠이란 자체가 아예 없다는 듯이, 그렇게 빛으로 머문다. 말 속에는 물론 어둠도 깃들어 있다. 말 속의 어둠은 모든 어둠을 대리하는 성질이 있다. 어둠이 빛과 가장 가까이 자리하는 장소는 말 속이다. 말 속의 어둠은 빛으로 옮겨지기를 원하는 어둠이다. 말이 없다면 어둠은 자기 스스로의 권위에 굴복해버릴 것이다. 어둠 자신은 물론 다른 모든 사물까지도.
침묵은 말에 속한다. 그렇다고 침묵이 빛에 대항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 침묵은 어둠이 아니다. 침묵은 산란된 빛이다. 그것은 어떤 하나의 빛, 즉 말의 빛 속으로 수렴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말의 슬픔은 빛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빛이 어둡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록 어둠이라도 빛으로 인해 환해질 수 있다는 것이 말의 위로이다.
거짓말의 빛은 스스로를 불태운다. 그 불은 빛이 있는 공간을 모두 활활 태우고 집어삼킨다.
탄생의 어둠과 죽음의 어둠 사이에서 인간은 말로 인하여 환한 중앙에 서 있다. 말의 밝음은 탄생의 어둠까지 가닿으며, 어둠을 과거로 밀쳐낸다. 마찬가지로 죽음의 어둠은 더욱 미래로 밀쳐낸다. 말의 빛을 통해서 탄생과 죽음은 바깥으로, 인간의 가장자리로 더욱 밀려난다. 탄생과 죽음은 말의 빛 둘레를 감싸는 검은 테두리다. 말의 빛을 소유하지 못한 동물에게 탄생과 죽음은 서로 그만큼 더 근접해 있다.
3
렘브란트의 그림에서 빛은 사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도리어 그 반대로 빛이 사물을 향해서 보내진다. 그 빛으로부터 사물이 탄생한다. 렘브란트의 빛은 빛 자체에서 나오는 빛이다. 스스로를 낳는 것은 빛이다.
렘브란트의 그림 〈부활〉에서, 말에 앞서서 나타나는 빛과, 그리고 말의 빛은 동일하다. 여기서 그 둘은 하나다. 빛이 말을 빨아들였다. 빛 속에 한 천사가 서 있다. 천사는 더욱 짙은 빛이다. 빛과 천사와 말은 하나다. 여기서 상상을 초월한 세계가 목격되고 말해질 수 있다. 모두가 변함없이 하나의 빛일 뿐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기로 결정했던 그 순간의 빛이 여기에 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이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신이 창조해놓은 그 빛이, 여기에 그려졌다.
헤르쿨레스 세헤르스의 그림에는, 사물이 말의 빛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인상이 있다. 고집 세게 저항하는 사물들이 거기 있다. 어쩌면 인간이 그들로부터 빛을 거두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슬픔의 어스름 속에 서 있다. 인간 역시 슬픔의 외투 속에 사물들을 모은다.
구약성서에서 말은 마치 금방 땅 속에서 파내 꺼내놓은 것 같았다. 말에는 아직 태초의 어둠이 묻어 있다. 말은 빛을 향해서 침묵했다. 그 침묵은 아직도 말 속에 있다. 말은 여전히 자기 자신만을 향하며, 자기 자신을 껴안은 채, 스스로의 빛에 의해 눈이 멀었다.
신약성서에서 말은 빛으로부터 떨어져나온다. 설사 말해지지 않는 순간에도 말은 지속된다. 말은 빛의 이슬과 같다.
오늘날의 말은 보편적인 의미의 빛을 갖고 있지 않다. 말은 단지 다른 말들에 의해서 빛날 뿐이며, 다른 말들 역시 또 다른 말들에 의해서 빛나고 있다. 말은 오직 간접적인 빛만을 발할 줄 안다.
4
헤겔은 빛을 "자연의 주체, 즉 자기 자신에게 도달한, 자신의 산물(태양)을 수단으로 자기 자신과 연계하는, 태양의 충만함 속에 자리하면서 그 안에서 파악되는 자연"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말은 우선적으로 외부의 밝음을 빛으로 만든다. 그러기 위해 말은 인간 내면의 빛을 외부로, 외부 공간으로 실어간다. 파스칼은 외부라는 공간의 무한성에 경악하고 말았다. 그의 경악은 근거가 있다. 외부의 무한성은 내부 공간, 즉 빛에 의해, 말에 의해, 차단이 된다. 말이 그 안에 없어야 비로소 외부의 공간은 무한히 뻗어나간다. 빛의 공간인 말을 집어삼켜버린다는 위협과 함께. 말 내면의 빛이 있는 곳, 그곳은 인간의 고향이다. 그러나 외부 공간의 밝음은 말이 공급하는 내면의 빛을 향해 치고들어오려고 하며, 공간 자체도 투명해지려고 한다.
공간의 밝음과 말의 빛은 서로를 추구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빛 속에서 위를 향해 들어올려지며, 그 자신의 말이 가진 빛에 의해 공간에서 수직으로 솟아오른다. 말을 갖지 못한 동물은 자기 자신을 벗어나지 못한다. 공간의 밝음은 동물을 비켜 스쳐지나간다. 인간은 빛 속에서 수직으로 위를 향해 자라나며 동물은 땅의 표면을 따라, 그 어둠을 향해, 옆으로 확장될 뿐이다. 밝음 가운데에 있을 때조차도 동물은 빛의 그림자와 같다.
5
들판에서의 일이 끝난 후 밤에 마을을 향해 귀가할 때, 처음으로 보이는 집의 등불이 어둠 속에서 깜박인다. 이것은 이미 최초의 대화가 시작되었다는 신호다. 빛은 선행하는 대화이며, 말이 스스로를 위해 미리 이루어놓은 선행하는 공간이다. 대화의 온기가 이미 빛 속에서 점화되었다. 홀로 걸어가는 고독한 인간의 침묵 속에서 말은 불현듯 집을 얻는다. 여전히 인간은 고독하게 침묵을 지키는 중이지만, 말이 거의 스스로 소리 내다시피 하며 말하기 시작한다. 고독한 인간은 아마도 그 집의 등불을 그냥 지나쳐갈 터이지만, 그의 어두운 침묵은 빛 속에서 환하게 밝아질 것이다. 그는 그 빛 속에서 자신의 말과 다른 이들의 말을 듣는다.
"황금보다 더 놀라운 것이 무엇인가?" 하고 왕이 물었다.
"그것은 빛이다." 하고 뱀이 대답했다.
"빛보다 더 생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다시 왕이 물었다.
"그것은 대화다." 하고 뱀이 대답했다.
(괴테)
6
오늘날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언어는 더 이상 빛이 아니다. 언어는 단순한 조명에 불과하다. 언어는 빛 아래를 파고들어가지만, 어디로 향해야 할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빛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소리만이 있으며, 말들은 서로 충돌하기만 한다. 소리가 빛을 대신한다. 파괴된 말, 말들이 만드는 소리는 그을음처럼, 빛 없이 불안하게 펄럭거린다. 축축하게 젖은 지푸라기가 타듯이, 하나의 소리에서 다른 소리로 옮겨붙는다. 불꽃도 없이 연기를 피운다.
하지만 말은 빛이 되고 싶다. 말은 빛이기 때문이다. 빛으로 존재한다는 기쁨을 원한다. 말은 소리로부터 나와서 빛이 된다. 소리는 말 속에 빛으로 깃든다. 음성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이 말 속에서 서로 중첩된다. 와해되어가던 말은 자신의 빛 속에서 스스로로 다시 결합된다. ("기억의 빛 속에서"라는 관용구가 이미 존재하지 않던가?) 말은 자신의 빛 속에서 지속적으로 생성된다. 말은 빛과 같다. 자기 자신의 자리에 머물면서, 동시에 모든 곳에 편재한다. 하나의 말을 들으면, 하나의 빛을 보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인간은, 말과 빛이 모든 곳에 편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세계는, 그 자신은 모르고 있겠지만, 어둠 속에서조차 빛으로 가득하다.
〔6〕 말과 존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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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에 나타난 언어의 존재성은 너무도 강력하여, 신조차도 그 존재성 안에서 출현할 수 있을 정도다. 말의 존재성은 인간뿐 아니라 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언어의 존재성이 사랑에 뿌리를 두지 않았다면 그것은 자기 스스로를 초월하여 자라나 마침내는 인간을 압도해버릴 것이다. 그것은 인간을 위협할 것이다.
말의 존재성은 인간을 단단하게 지탱해준다. 과도하며 과격한 역동성으로부터 인간을 지켜준다.
말을 통해서 인간 역시 존재적으로 현존하게 된다. 하지만 인간만 그런 것은 아니다. 전체 피조물이 인간의 말을 통해서 존재적이 된다. 객체의 존재는 말을 통해서 확인되며, 그렇게, 객체와 말을 통해서, 세계가 형성된다.
언어의 존재성은 다른 존재적 현상들과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자면 자연, 사랑, 탄생과 죽음 등이다. 말은 다른 존재적인 것들과의 연관으로 더욱 강력해진다. 말의 소리는 자연의 소리와 대치하는 위치에 있을수록 더욱 분명하게 인간의 소리가 된다. 말의 침묵은 자연의 침묵 앞에서 침묵할 때 비로소 인간의 침묵이 된다. 죽음과 언어의 관계. 사랑하는 이가 죽음을 당했을 때, 말을 통해 흘러나오는 눈물에 의해 언어는 폭력으로부터 정화된다. 목적에 따른 기능이란 협소한 통로에 밀어넣어질 때 언어는 움츠러들며, 환희에 의해서 따뜻하게 데워지면 언어는 다시 확장되고 상승한다.
2
"사람들은 '지구가 태양에게 이르렀다'라고 말하지 않고 '태양이 떠오른다'라고 표현한다." (마우트너, 《언어비평》) 그러나 언어는 존재적이므로, 언어로 올바르게 표현하자면 태양은 위로 떠오르는 것이다. 태양은 위로 떠오르는 것은 단지 그렇게 보이는 현상만은 아니다. 인간에게는 태양이 머리 위로 떠오르는 것이 맞기에, 언어를 통해 태양은 실제로 위로 떠오른다. 지구가 태양에게 이르는 것은, 단지 물리적인 추상의 개념일 뿐이다. 존재의 진리는 눈앞에 나타나는 현상을 유효한 것으로 만든다.
〈중세 시가에서의 건축적 상상〉에서, 트리어는 "중세 건축의 언어적 고독"에 대해서 말한다. 언어는 건축에 말로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존재적 말은 침묵 또한 포함하고 있다. 침묵은 말에 속하며 그 침묵을 통해서 말은 건축으로 나아간다. 건축은 침묵 속으로 편입된다. 건축은 말 속에서 함께 침묵되며, 따라서 고독하지 않다. 말이 침묵을 포용하는 힘을 잃어버린 다음에야 건축은 비로소 고립된다. 건축은 원래 자신에게 속했던 것, 말의 침묵을 잃는다. 이제 건축의 침묵하는 본질에 반하여, 침묵 없는 말로 건축에게 말이 건네진다. 하지만 야콥 부르크하르트는, 건축물들이 침묵 속에서 서로에게 귀 기울이는 현상 이상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3
언어의 존재성은 어느 순간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항상 거기 있어왔던 것에 가깝다. 언어는 너무도 강렬하게 현존하므로, 설사 파괴된다 해도 스스로 자신을 생성할 수 있을 정도다. 말은 단지 인간에게만 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말은 공기 중에도 묻혀 있어서, 파멸 다음에 발생할 침묵 속에서도 다시 소리로 되살아날 것이다.
언어의 존재성은 과거의 것과 미래의 것을 자신의 현재 속으로 끌어올 수 있다. 그래서 종종, 인간의 의도를 넘어서서, 하나의 말 속에 현재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가 동시에 들어 있는 것이 가능해진다. "언어에는 예언적이면서 동시에 이미 감동 받은 무엇이 들어 있다." (주베르)
존재성을 가진 언어는 낯선 외국어 어휘조차도 마치 예전부터 익숙한 말이라는 듯 자신 안으로 포용하고 내재화하는 능력이 있다. "독일어는 이방 언어를 제한 없이 받아들이는 성질이 있지만 결코 그로 인해 빈곤해지거나 축소되지는 않을 것이다. 항상 싱싱하고 푸르른 독일어의 족보는 자신이 양자로 삼은 이방의 언어보다 수백 배나 많은 자식과 손자 증손자를 양산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수세기가 흐른 뒤에는 쑥쑥 자라난 우리의 원래 어근들이 무성한 숲을 이루고, 씨앗으로 날아와 겨우 싹을 틔운 외래어 어휘들을 질식시키고 그늘로 덮어버릴 것이다." (장 파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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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성은 언어를 인간과 사물 사이에 위치하는 제3의 존재로 만든다. 언어가 장벽처럼 사물 앞에 서 있을 경우 인간은 즉각적으로 사물을 장악하기가 불가능하다. 존재적 힘은 나와 객체 사이에 거리를 형성한다. 말을 소유하지 못한 동물에게는 이러한 거리가 없다. 그래서 동물은 주저함 없이 객체를 붙잡아버린다. 동물은 객체를 붙잡기도 전에 이미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거리 때문에 인간은 수줍음을 느낀다. 동물의 경우는 단지 공포심만을 느낀다. 그러나 인간은 말을 파괴함으로써 주줍음마저도 파괴해버렸다. 그래서 인간도 이제 공포심을 갖는다. 공포와 뻔뻔한 행위는 서로 일치한다. 수줍음은 말을 태초의 것, 보호받는 것과 근접한 위치로 데려간다. 수줍음의 바깥에 있는 말은 거칠고, 불편하며, 온갖 목적을 위해 사용되지만 그 어떤 다른 것으로도 대체될 수 있는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다.
〔7〕 언어의 의미
1
인간의 언어는 세계의 질서 속에 짜넣어진 무늬다. 인간이 사물을 언어 속으로 거두어들이지 않으면, 사물은 사물 스스로를 형성하면서 독자적으로 말을 할 것이다. 세계는 지속적인 폭발이 된다. 재앙과 돌발, 이것이 사물의 언어일 것이다. 사물은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게 된다. 세상은 마법에 걸린다. 말에 의해서 정의되지 못하고 말로 정의 하지 못하니, 신조차도 우상이 되고 만다. 괴물이 되고 만다. 인간도 함께 변화하고 함께 마법에 걸린다. 인간의 말에 의해서만이 인간과 사물은 안정을 유지한다./ (...)
자연의 돌발은 인간의 말과 함께 중단된다. 말이 법을 출현시킨다. 이제 사물의 침묵은 더 이상 위협적이지 않다. 사물의 침묵은 인간의 침묵과 연결되며, 그로 인해 인간의 언어와도 연결된다. 말과 함께하면서 인간은 침묵하는 사물의 위협으로부터 구원된다. 그와 동시에 인간은 사물을 구원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간이 떠나고 없는 쓸쓸한 자연 풍경은 저 혼자 스스로 자라며 넓어지는 듯이 보인다. 평야는 저절로 확장된다. 바위는 점점 더 서로를 향해, 점점 더 하늘을 향해 가까워진다. 물줄기는 땅 속으로 더욱 파고들어가며, 지하에서 솟아나는 물줄기에서 다시 밀려난다.
언어를 파괴해버리면, 인간은 원초적 말과의 연관도 잃어버리고 만다. 인간의 말과 그 말의 표준은 원초적 말로부터 나왔다. 그러면 외부 세계 또한 다시금 무질서로 빠져든다. 사물은 무절제해진다. 하지만 이번에 무절제를 양산한 것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다. 여기에 자발적으로 확장하는 기술이 적용된다. 인간의 말이 사물을 작동시키지 않으므로, 사물은 저 혼자 작동해버린다. 시간의 최초와 시간의 최후에 사물들은 서로 닿는다(비코). 단지 최초에는 자연의 산물이었던 것들이 최후에 이르면 시멘트로 만든 모조품이 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인간의 본질은 존재의 본질로부터 스스로를 규정한다." (하이데거) 하지만 실제로는 존재의 본질이 인간으로, 인간의 말로 규정되는 것이다. 존재는 자신을 열어 보인다. 그리하여 인간에 의해서 규정되고, 인간의 말로 이끌어진다. 더 이상 인간에 의해서 규정되지 않는다면, 존재는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를 규정해버릴 것이다.
3
(...)/ 인식의 말에는 신의 인식이 남긴 흔적이 있다. 인간이 인식의 능력을 갖는 것은 신에 의해서, 창조의 말에 의해서 먼저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인식의 흔적을 사용해서 인식한다. 그 흔적 안에서 인간에게 인식이 주어진 것이다. 개별 인간의 인식은 앞서 주어진 인식의 영향 아래서만이 가능하다. 인간은 스스로의 능력보다 더 높은 경지의 인식을 수행한다. 언어는 인간을 인간 자신보다 더, 언어로 말해진 것 자체보다 더 높이 상승시킨다.
"인간의 원초적 상태와 존속이 사고와 언어에 기대고 있지 않다면, 인간은 사물의 본질을 인식할 능력이 없을 것이다." (바아더)
인간은 항상 앞서 주어진 것을 바탕으로 하여 사고하고 말하는 것이지, 결코 혼자 완벽하게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은 다른 존재로부터, 앞서 주어진 것으로부터 인간에게 온다. 그리고 한 인간에게서 다시 다른 인간에게로 전달되려고 한다.(〈언어의 선험성〉장 참조). 말이 있으면, 이미 거기에는 다른 인간이 있는 것이다. 다른 존재와의 분리, 다른 존재와의 결별은 어떤 특별한 행위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말 속에는 결별보다 더 많은 성분의 관계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언어 자체에 이미 관계의 요소가 있는 것이다. 말과 사고는 처음부터 다른 인간과의 연관을 고려하여 생겨났고 또 말해지는 것이므로, 인간은 다른 인간을 대상으로 악을 행하려 해도 결코 완전하게는 행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악을 행하려는 인간의 내면에서 이미 다른 인간은 함께 생각하고 함께 행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4
인간은 매 순간 말을 통해서 자신의 구조와 자신의 과거를 넘어설 수 있다. 그러나 말을 갖지 못한 동물은 자기 안에 갇혀 있을 뿐이다. 인간은 말을 통해서 지속적이 되며, 동물은 동물인 채 지속적으로 머문다. 동물은 세계에 갇힌 존재다. "말없는 동물에게 이 세계는 하나의 압인이다." (장 파울)
인간의 몸짓, 인간이 자신을 표현하는 동작은 동물의 동작과는 다르다. 동물에게 그것은 부재하는 말의 대체물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대체물의 반대, 과잉하는 말이다. 극도로 채워진 말이 육체의 경계를 넘어 흘러나와 마침내 육체를 말과 정신의 작용에 동참시키는 것이다.
설사 침묵하고 있을 때라도, 인간은 말이다. 침묵은 말해지지 않은 말 이상의 것이다. 침묵하고 있을 때라도 말은 거기에 있다. 인간의 얼굴과 형상에 뿌리 내리고 있다. 형상은 침묵하면서 함께 이야기하고, 그러면서 침묵과 함께 형성된다. 치마부에, 두치오, 시모네 마르티니의 마돈나들은 침묵한다. 만약 그녀들이 말을 기다리는 상태가 아니라면, 그녀들은 자신들이 나온 무한으로 회귀해버릴 것이다. 말이 그녀들을 인간의 척도에 머물게 한다.
왜 그림이 아니라 말이 인간만의 독특한 자기 표현이 된 것일까? 그림은 말처럼 의미가 분명하지 않다. 물론 그림에도 정신이 깃들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림 속에서 정신은 잠잠하다. 그림 속에서 정신은 휴식한다. 하지만 말 속에서는 깨어 있으며, 그래서 말은 그림보다 더 직접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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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역시 말에 의해서 보호를 받는다. 말은 모든 것을, 일어나거나 존재하는 모든 일을 그대로 인간에게 전달하지 않는다. 언어적 끔찍함을 능가하는 실제의 끔찍함이 세계에 현존한다. 오늘날 인간이 갖는 공포심은 많은 경우 언어를 위협하는, 언어 주변을 맴도는 외적인 과도함에서 나온다. 독재자는 엄청난 경악스러움을 돋보이기 위해, 언어 자체를 수단으로 취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소름 끼치는 공포를 자아냈다. 독재자는 상상을 초월한 잔혹한 만행을 저질렀고, 그러면서 말과의 조우로부터, 말의 표준으로부터 회피하려고 했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였다. 인간의 말이 아직 있기도 전인 태초의 진실한 세계를 철저히 모방한 악마의 세계. 수백만 인간의 목숨을 앗아간 가스실 앞에서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삭재된 사고가 있을 뿐이다. 생각과 말을 지워버리는 삭제행위. 독재자는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울부짖었다. 구타하는 독재자의 울부짖음과 구타당하는 자들의 울부짖음은 하나였다. 광폭한 범죄를 재촉하는 울부짖음과 범죄현장 자체의 울부짖음에는 차이가 없었다. 말은 더 이상 거기에 없었다. 단지 범죄행위와, 놀라서 숨을 죽인 침묵이 있었을 뿐이다. 잔혹함에게 대답할 때도 독재자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의 대답은 더욱 커다란 잔혹함이었다.
〔8〕 말과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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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한때 진리가 온전하게 들어 있던 언어로 말한다. 신이 그 언어로 말했기 때문이다. 언어의 슬픔 중 하나는 신이 더 이상 그 안에 없다는 점이다. 이제 언어 속에 있는 것은 절망한 그 무엇이다. 시도했다가 실망하는 것, 앞으로 나서긴 했으나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가버리는 몸짓, 몸을 일으키긴 했으나 다시금 주저앉아버리는 행위가 지금 언어 안에 들어 있다. 언어는 한때 말 속에 깃들어 있던 자를 기다린다.
시에서는 언어가 절망을 잊은 것처럼 보인다. 신이 비워놓은 공간이 시에 의해서 채워진다. 그러나 시는 공간을 점령하지는 못한다. 시는 공간에 가볍게 떠 있고, 환영처럼 나타나나 싶다가도 바로 다음 순간 사라져버린다. 시가 사라지고 나면, 그토록 고대하는 말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커진다. 멜랑콜리는 더욱 깊어진다. 시는 언어의 공간이 신의 공간이기도 하다는 기억이다.
옛날의 언어에는 일종의 신중함, 어떤 느림이 있었다. 인간에게 오는 그리스도, 그에 관한 선행하는 떨림, 선행하는 견지가 옛날의 언어 속에 있었다. 옛날의 언어는 오늘날의 언어가 여운으로 떠는 것보다 더 많이 예감으로 떨었다. 말 속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현신을 잊기 위해, 오늘날의 언어는 스스로 과도하게 말한다.
〔9〕 말과 결정
1
인간이 스스로 결정을 하기 이전에, 신은 말을 통해서 인간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결정은 세계의 구조 안으로 편입되었다. 자유는 인간에게 앞서 주어졌다. 바로 그 덕분에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행할 수가 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앞서 주어진 자유로 인해 자유로운 존재다. 말도 그 안에 자유를 실어 보낸다. 말은 인간을 위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자유행위로의 이행은 이미 말 속에 깃들어 있다. 말은 태초의 것을 건드린다. 태초란 인간의 창조가 결정된 순간이다.
신은 특별한 행위 없이도 항상 자유롭다. 특별한 결정 없이도 항상 결정적이다. 그래서 신에게 말과 침묵은 하나다. 신은 말을 통해서 침묵하고 침묵을 통해서 말한다.
인간은 말한다. 첫 번째 어휘가 입에서 나오는 순간, 인간은 언어의 공간으로 옮겨진다. 그곳에는 선과 악을 직접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설사 인간이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다 해도, 그는 그곳에, 결정이 가능한 공간에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말을 함으로써 더욱 높은 곳을 향해 말하게 된다.
아마도 최초의 말은 경악의 외침으로 발생했을 것이다. 인간은 경악했다. 신의 결정이 이루어진 공간으로 자발적으로 들어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행위는 원래 인간에게 주어진 것보다 더 많은 자유를 허용한다. 그것은 인간을 인간 이상의 존재로 상승시킨다. 인간은 그로 인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높이 들어올려진다. 인간은 자기를 초월하여 더 높은 곳으로, 자신이 원했던 것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인간이 언어로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언어 자신도 들어올려진다. 이미 태초부터 언어는 결정을 위해 있어왔다. 언어는 결정의 말을 기다린다.
인간의 정신을 깨우는 충만은 결정에게 속한 것이다. 결정되는 것은 홀로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로, 정신의 충만으로 포용되어야 한다.
2.
인간은 말로 인하여 인간이다. 하지만 인간이 주체로 태어나는 것은 말로 결정을 내릴 때다. 결정 내림은 소리로 울린다. 말해진다. 그렇게 인간은 탄생한다. 주체가 된다. 인간은 이미 앞서 창조된 존재였다. 그리고 결정에 의해서 다시 한번 스스로를 창조한다.
침묵하고 있을 때,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은 상태일 때, 인간은 아직 완전한 자기 자신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침묵 속에서 널리 퍼지며 인간 외부의 다른 모든 침묵하는 것들과 연결된다. 인간의 침묵과 사물의 침묵은 아직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다. 인간은 스스로의 테두리를 분명하게 형성하지 못했고, 자신과 연결된 사물로 인해 언제든지 변신할 수 있는 상태다. 인간은 대개 주체가 되려고 준비하는 과정에 있기 마련이다. 어떤 결정이 내려진 다음에야 주체는 형성된다. 그전에는 단지 결정을 기다리는 주체의 이전 단계일 뿐이다.
인간은 결정을 내림으로써 자신의 내부와 외부에서 침묵하는 것들과 연결을 끊고 작별한다. 그리고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이것이 모든 자유의 기초가 된다./ (...)
〔10〕 인간에 내재한 전체로서의 언어
1
(...)/ 가을이 되면 우리의 추운 나라를 떠나 이집트로 날아가는 새들을 생각해보라. 새들은 자신들의 눈앞이 아니라, 자신들 안에 이집트를 갖고 있다. 이집트는 몸에 난 깃털과 마찬가지로 새들에게 속한 어떤 것이다. 그러므로 이집트에 도착한 새들은, 자신들이 항상 있어왔던 그곳에 그대로 있는 셈이다. 언어도 이와 마찬가지로 온전하게 하나의 전체로서 인간 안에 있다. 인간이 말을 하기 이전에 언어는 이미 침묵하는 전체로서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언어는 인간 안에서 하나의 전체다. 그리고 지속적이다. 그로 인해 인간은 연속성이라는 내면의 역사를 갖는다. 언어는 정신의 연속성을 위한 기초가 된다./ (...)
2
인간이 말을 하는 것은 침묵하는 내면의 언어에서 말을 꺼내오는 것이다. 말과 말이 엮여 있는 거의 무성적인, 침묵의 관계로부터 필요한 말을 꺼내와 이성으로 구축한 새로운 관계를 부여한다. 입 밖으로 말해진 언어는 이성에 의해서 다시금 전체로 태어난다. 입 밖으로 꺼내진 말의 논리적 원칙이 어두운 내면 언어의 전체성을 빛 속에서 재창조한다.
대화는, 다른 많은 예와 마찬가지로, 말을 통해서, 말의 주고 받음을 통해서, 침묵하는 어둠의 언어에 전체성을 부여하고, 말해진 밝음 속으로 들어올리려는 노력이 아닐까?
침묵하는 내면의 언어로서 그 침묵의 관계 속에 있다가 밖으로 끌어내진 말에게 다시 새로운 관계를 부여하는 것, 정신의 이 행위는 사랑의 행위다. 그래서 사랑과 언어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한다.// (...)
〔11〕 언어의 구조
1
언어의 양상, 언어의 외관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이야기하는 사람을 볼 때 알아차릴 수 있다. 그것은 인간 앞에 쏟아진 소리의 무더기다. 인간은 그 무더기의 바로 앞에 서 있다. 무더기는 끊임없이 쏟아졌다가 다시 사라져버린다. 두 사람 사이에 무더기가 가로막고 있으므로, 처음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접근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어느 순간, 마치 누군가가 무더기를 치워버린 듯이, 두 사람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서 있다.
말은, 단지 형태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두 사람 사이에 있는 듯하다. 거의 적대적으로,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으면서 툭 던져진다. 두 사람이 그 말을 이해하리라는 전제와 함께. 말은 인간에게 툭 던져진다. 인간 자신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순전히 형태적인 측면에서는 이것이 명백하다. 정신의 힘으로 인간은 이 소리의 덩어리에 맞선다. 덩어리는 정신으로 제압당하기를 기다린다.
동물의 으르렁거림에서는 이 양상이 다르게 나타난다. 두 마리 동물이 내는 으르렁거림, 소리의 덩어리는 그들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물 자신의 확장이나 마찬가지다. 허공 중에 생체기관이 하나 생겨나, 다른 신체기관들과 마찬가지로 움직이면서 울부짖는 것 같다. 그래서 동물의 울부짖음은 거의 항상 무서운 경악을 불러일으킨다. 동물은 울부짖으면서 스스로 확장되는 것 같다. 하지만 정확히 어디가 확장되는지는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다. 동물은 울부짖으면서 으스스한 존재로 변해간다.
언어의 양상, 말은 거기 있으나, 또한 거기에 없다. 어느 한순간 들렸다가, 다음 순간 사라져버린다. 말의 양상은 인간의 양상과 같다. 인간은 다른 인간 앞에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져버린다. 자기 자신 앞에 나타났다가 자신 앞에서 다시 사라져버린다. 인간과 인간의 말은 정신에 의해서 비로소 현재적이 된다.// (...)
〔14〕 말과 사물
1
잡음어가 장악한 언어에서 말은 오직 기호다. 사물은 휙 스치고 지나가는 존재일 뿐이다. 그것이 어떤 사물인가 하는 것은 거의 문제시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사물의 거기 있음에 대해서 말로 대답해야 한다. 그것에 대답하는 것은 인간의 영예다. 인간은 사물의 이름을 불러줌으로써, 사물이 인간에게 도착했음을, 인간이 사물을 받았음을 창조자에게 알리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말을 가진 이유다. 인간의 말은 다른 무엇보다도 창조자에 대한 대답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창조의 결산서다.
하지만 시인은 이 이상의 일을 한다. 창조자가 창조한 것을 분명히 보았다고 알리는 것을 넘어서, 자신 주변의 사물을 말로 포착해내고, 시인 자신의 말로 묘사하여 다시 창조자에게 되돌려보내는 일을 한다. 시인의 말은 사물을 둥실 뜨게 만든다. 시인의 말은 경직된 명료함이 아닌, 둥실 떠가는 명료함이다. 그것이 시의 진정한 리듬이다. 그것이 사물을 인간에게로 데려온다. 하지만 동시에 사물을 다시 창조자에게 둥실 떠가게 하기도 한다.
객체는 말에게 정확히 둘러싸임으로써 말을 돕는다. 그것은 객체 안에 깃들어 있으면서 객체를 초월하는 과잉이다. 객체가 객체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기 위해 과잉은 필수적이다. 객체의 이 과잉은 말의 과잉과 조우하기를 기다린다(〈언어의 선험성〉장 참조). 그래서 객체는 말을 향해 밀려난다.
말은 그 자신의 순수한 사실성 너머에서 객체와 만난다. 그것은 모든 말 속에 들어 있는 초월이다.
2
말이 객체를 둘러쌀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과 객체와의 만남이 성사되어야 한다. 인간과 객체가 서로 만나는 것은 하나의 행위다. 일단 그러한 만남이 일어나면, 인간과 객체는 다른 모든 왕래로부터 격리된다. 그들이 마주치는 순간, 하나의 인간과 하나의 객체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형성된다. 태초와 같은 상태가 회귀한다. 태초의 모든 힘이 회귀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제 더 이상 객체와 만나지 않는다. 객체와 객체의 만남이 있을 뿐이다. 객체는 인간을 스쳐지나가기만 한다. 인간 스스로는 객체를 거의 건드리지도 않는다. 인간과 객체의 만남은, 마치 기계장치를 통해 이루어지듯, 미리 자동으로 다 처리된다. 만남이 인간에게 배달된다. 말은 객체가 인간에게 배달된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기호에 불과하다.// (...)
그에 반해서 "만개한 헛소리" 같은 유의 조합은, 말과 사물이 단단하게 결속해 있지 않은 환경에서만 가능한 표현이다. 활짝 핀 꽃을 지칭하는 "만개한"을 나무에서 뚝 잘라내 "헛소리"에 가져다 심을 수 있으려면 말이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의 훨씬 역동적인 언어가 원시부족의 정적인 언어로 회귀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사물이 우리와 만나기도 전에 미리부터 우리의 역동적인 언어로 사물을 멀리 때어놓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대신 역동성 안에서 사물과의 만남을 분명히 만들어서, 만남이 역동성보다 더욱 강해지도록 해야 한다. 역동성 자체는 주된 목적이 아니고 단지 만남으로 이끌어주는 수단일 뿐이다. 아래 게오르그 트라클의 시에서 나타나듯이.
〈거룩한 가을〉
거칠게 한 해가 끝을 맺는다.
황금빛 포도주와 정원의 열매들로.
둥글게 침묵하는 숲들은 놀랍구나
고독의 동행자들이여.
농부는 말한다, 참으로 평화롭구나.
저녁 종소리는 길고 나직하니
마지막까지 행복감을 선사하고
철새의 무리가 작별인사를 한다.
때는 사랑에게 온화한 시간,
나룻배를 타고 푸른 강물을 흘러가니
풍경과 풍경들이 차례로 아름다워라―
고요와 침묵 속에서 하나하나 사라져간다.
역동적인 언어. 사방에서 다가오며 사방으로 흩어져가는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가을은 분명하게 여기, 이 시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머물러 있다. 이 시의 가을은 모든 가을 중의 가을이다. 이것은 지상의 가을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존재하는 가을이며, 언젠가 이 지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그날 이후에도 모든 가을을 관통하며 계속해서 홀로 노래할 것이다.
가을이라는 이 사물은 말을 통해서 있다. 말이 사물이 될 때, 말은 행복한 과잉으로 나타난다. 사물이 거기에 있다. 그리고 말을 통해서, 사물은 다시 한번 거기에 있다. 이 과잉 안에서 언어는, 사물을 에워싸야 한다는 불가피성에서 풀려난다. 언어는 자유이며, 따라서 아름답다. 매번, 말이 사물을 온전히 말하는데 성공할 때마다 인간은 행복하면서 동시에 우수를 느낀다. 언어에는 잃어버린 전체성에 대한 그리움이 깃들어 있다.
사물은 이 시를 통해서 거기에 있다. 그러면서 또한, 말과 함께 태초의 시간에 있다. 말과 사물이 탄생한 그 태초의 시간에. 그곳에서 은폐된 상태로 있으면서, 동시에 여기 환한 빛 아래 분명히 모습을 드러낸다. 태초의 어둠과 현재의 환함은 동일하다. 베네치아 산 마르코 성당 홀의 모자이크처럼. 노아의 방주, 대홍수, 방주 안의 인간과 동물들이 지금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처럼 묘사된다. 그러나 그림 속 인물들 바탕에 깔린 황금빛 광채는, 홍수와 방주가 있었던 태초의 시대로 시간을 되돌린다. 황금빛 광채 속에서 태초와 현재는 하나로 연결된다. 그 광채 속에서 그들은 태초에 있는 동시에 지금 여기에 있다. 그리하여 한 번 일어난 일은, 일어나기를 멈추지 않는다.
3
말로 인하여 비로소 사물이 있다. 사물은 말로 인하여 부풀어오르며, 말로 인하여 팽창한다. 그래서 사물은 말을 기다린다. 사물은 인간을 재촉하여, 인간이 그 이름을 부르도록 만든다. 사물들 사이에는 주목받고 싶은 경쟁심 같은 것이 있다. 그래서 인간의 주의를 끌어 인간의 말이 자신에게 오게 하려고 분투한다.
말 스스로도 객체를 필요로 한다. 말은 객체에게 붙잡히고, 객체에 의해 보호된다. 하나의 사물과 함께 묶인 말은, 다른 말에게 쉽게 연결되어 끌려가지 않는다. 그것을 떼어내려면 특별한 행위가 필요하다. 객체에게 붙잡혔기 때문에, 말이 거기에 있다. 전체 언어가 거기에 있다. 그래서 설사 언어를 말하지 않더라도, 인간은 언어를 갖는다. 언어는 침묵하면서 이야기하는 객체들에 의해서 현존한다./(...)
5
오늘날의 말은 객체가 없다. 예를 들어 시는, 더 이상 자신이 노래하는 객체들을 통해 설명되지 않는다. 대신 시어를 명확하게 해줄 다른 어휘들을 추구한다. 말은 더 이상 객체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말에 기대어 자신을 설명한다. 오늘날의 시인은 거의 항상 객체가 없다. 시인이 가진 것은 오직 말뿐이다. 카프카에게는 독자들이 사물을 짐작할 수 있는 공간이 남아 있다. 마치 지하의 공간에서 울려퍼지는 듯한 소리가 있다. 반향하는 공간의 메아리 속에서 독자들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와 사물들이 움직이는 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한다.
창조가 있었던 태초의 시간에 사물은 말없이, 이름없이 거기 있었다. 오늘날 말은 사물 없이 거기 있다.// (...)
말로부터 떨어져나온 객체는,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오고, 인간이 원하는 것이 아닌 객체 자신이 되고자 원하는 것으로 변한다. 더 이상 인간에 의해 말해지지 않는 사물은, 자기 스스로를 통해 말하기 시작한다. 말에 의해서, 말의 표준에 의해서, 말의 주술적 힘에 의해서 통제되지 못하는 사물은 무한정으로 자라고 또 자란다. 사물은 성장을 통해 말과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자기 자신에게로 속하게 된다. 점점 새로운 표준을 향해 자라면서, 점점 새로운 표준에 맞추어 자신을 가리켜 보이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사물은, 더 이상 사물을 갖지 못하므로 말 또한 갖지 못하는 인간을 가리켜 보일 뿐이다.)
사물이 말의 통제 영역 바깥에 있기 때문에, 단지 그 이유로 오늘날 사물은, 공장이든 도시든, 거대하게 팽창할 수밖에 없다. 기계들로 가득찬 공장의 사면 벽은 공간의 끝이 아니라, 자꾸만 새롭게 나타나는 공장을 향해 열려 있는 문과도 같다. 도시는 스스로 자꾸만 팽창해나가는 암석과도 같다. 가만히 있는가 싶다가도, 금방 여기저기 틈새의 공간들이 생겨나고, 거리와 광장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계속해서 다시 돌처럼 굳건히 뚜벅뚜벅 앞으로 진행한다. 끝도 없이. 인간은 당황하고 소외된 채, 이러한 암석의 움직임을 어떻게든 따라잡아보려고 한다. 앞서서 진행하는 돌의 커다란 보폭에 보조를 맞추어보려고 한다. 종종 인간은 도로에서는 자동차를 타고, 도로 상공에서는 비행기를 타는 식으로, 자신이 더 빠른 존재인 척 과시하고 싶어한다.
미국과 러시아. 인간은 이런 거인의 본질을 움켜쥘 만한 말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이 두 나라는 갈수록 커지기만 한다. 그들은 크기로 말한다. 양적 팽창이 곧 그들의 말이다. 그들의 말은 초인적이고 초사물적이다. 신적인 전율은 거대함이 불러일으키는 가상 전율로 치환된다.
이것은 실제로 거대함의 폭동이다. 이것은 말로 보호받지 못하는 사물의 폭동이다. 폭동 속에서, 위협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사물이다. 이런 폭동을 통해서 사물은 이야기한다. 인간의 말이 그들을 향해서는 이야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16〕 말의 시간과 공간
1
인간은 말로 인하여 비로소 현존한다. 말이 현재를 창조한다. 말이 있기 이전, 시간은 모호했다. 서로 뒤엉켜 불분명한 형태로 와해되는, 과거에서 현재와 미래로 넘어가는 장기적인 과도기가 있었을 뿐이다. 말에 의해 창조되는 현재는 너무나 강렬하여, 늘 거기 현존하고 있었던 것만 같다. 그 강렬한 현재 안에서 과거와 미래는 흡수되어버린다.
말은 두터운 보호막으로 둘러싸여 있다가, 현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보호막을 벗는다. 말은 현재에 이르러서야 자기 자신이 된다. 그러나 모든 말이 당장 현존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보호막 속에 머물고 싶어하는 말들도 종종 있다. 그것은 앞으로 도래할 미래에 보호막을 벗고 현존하게 되리라는 약속이다.// (...)
〔18〕 말과 목소리
1
인간보다 훨씬 더 먼저,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울리기 시작한 어떤 목소리가 있다. 그러나 인간이 있은 다음에야 그 목소리는 들리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종말 이후까지도 계속해서 울리게 된다. "인간의 영혼을 붙잡아 영원의 세계에서 현세로 끌고온 소리가, 인간의 목소리 안에 여전히 메아리로 남아 있다. 그로 인해 목소리는 도저히 혼동할 수 없는 특별한 음색을 부여받는다." (《인간의 얼굴》)
하나의 인간을 다른 인간과 구별하는 것, 개성은 얼굴보다는 목소리에서 더욱 확연하다. 목소리는 얼굴처럼 심하게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목소리는 인간을 둘러싼 자연이나 공동체의 환경으로부터 얼굴보다 자유롭다. 나이가 들면서 목소리의 선명함이나 밝은 톤은 사라질 수 있고 음색도 거칠어질 수 있지만, 목소리에 깃든 특유의 개성은 계속 남아 있다. "티톤이 제우스에게 불멸의 삶을 달라고 간청했을 때, 그는 영원한 젊음을 포함시키는 것을 잊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불멸의 목소리로 쪼그라들고 말았다." (장 파울)
사람은 목소리로 어떤 사람을 즉시 알아차릴 수가 있다. 또한 목소리를 들으면 그 사람의 인성이나 특징도 파악이 가능하다. 물론 얼굴도 즉각적인 파악의 수단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의 얼굴을 뚫어지게 관찰해야 하고, 그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 될 수 있다. 반면에 목소리는 그 자체가 신호다. 가장 전면에 있는 일차적인 신호.// (...)
〔19〕 그림과 말
1
그림은 침묵과 말 사이에 있다. 그것은 침묵에, 그리고 말에 영향을 미친다. 테두리로 제한된 그림에서 침묵은 제한된다. 또한 그것은 적극적인 침묵이기도 하다. 그림의 바깥에 있을 때 사물은 다른 사물이 가까이 접근하면 동요한다. 침묵 속에서 동요한다. 그림 속에서 사물은 이야기하는, 안정된 침묵이다. 그림은 말을 다수리는 힘이 있다. 인간은 그림 앞에서 침묵한다. 말은 그림으로 인해 진공으로 흡수되어버린다. 그래서 침묵 속으로 회귀해버린 듯하다. "그리하여 영원을 갈망하는 우리의 모든 꿈이 영원으로부터 단번에 지워진다." (장 파울) 그리하여 말은 그림으로부터 지워진다. 그림 앞에서 인간은 일순간 말을 잊는다. 하지만 다음 순간, 마치 그림에서 솟아난 듯 말이 다시 나타난다.
침묵하는 그림은 말에게 자신의 침묵에 관해 전달한다. 그림은 말이 무절제해지는 것을 방지한다. 그림은 말을 붙든다. 그림은 말할 수 없는 것, 공인된 비밀의 세계로 돌진하려는 인간을 제지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그림 앞에 선 말은 그림이 침묵하는 내용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것에 대해서 침묵을 지킨다.
그림의 침묵은 결함이 아니다. 그 침묵은 말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말은 그림 앞에서 휴식을 취하며 소생한다. 인간은 침묵하는 그림을 갈망한다. 그것은 인간이 말로 인해 타락하기 이전의 낙원에 대한 기억이다. 인간의 원초적 기억은 그림으로 인해 되살아난다. 침묵하는 그림 앞에서 인간은 모종의 기대감에 떤다. 침묵은 뜻밖의 사건에 대한 가능성이다.
추상화에서 말은 흡수되지 않는다. 대신 밀려날 뿐이다. 그림 속의 붓자국은 하나하나가 말을 찔러 죽이는 창살과 같다. 여기에는 그림의 침묵이 없다. 단지 말 못하는 붓자국이 있을 뿐이다.
2
(...)/ 인간은 그림을 응시하는 것보다 그림에 의해서 더 많이 응시당했다. 그림이 인간을 응시했다. 그림의 눈동자가 인간에게 향했고, 그림 앞에서 인간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림에 의해 응시당함으로써, 인간은 응시하는 법을 배웠다. 그림에 의해서 침묵당함으로써, 인간은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여기서 인간은 말을 배웠다. 이 침묵하는 그림의 세계에서 말은 쉽지 않았다. 말을 위해서는 하나의 행동이 불가피했다. 하나의 행동을 침묵으로부터 꺼내와야만 했다. 침묵에 대항하여 하나의 행동이 있은 다음에야 말이 탄생했으므로, 말은 많은 것을 의미했다. 말은 그림 앞에서 견뎌야만 했고 그림에 대항해야만 했다. 말은 온전히 진실이어야만 했다. 말은 진실을 통해서만이 그림에 맞서서 최초의 현존을 획득할 수 있었다. 말은 항상 그림에 맞서서 자신을 주장해야만 했으므로, 틀에 박힌 표현으로 전락할 위험이 오늘날보다 적었다.
〔20〕 말과 시
1
시는 세계 자체이며, 가장 근원적인 세계다. 그 세계로부터 시인의 경험이 나오며, 자신의 시에서 시인은 현실을 경험한다. 시인은 현실에서 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시에서 출발하여 현실로 진입한다. 높은 것이 낮은 것을 향해, 현실로 가라앉는다. 시인의 세계는 객체를 추구하고(res poetica diffusiva sui), 객체에 의해서 추구된다. 객체는 현실을 시의 세계로 밀어넣는다. 현실은 시 속으로 받아들여지기를 기다린다. 현실은 시인의 경험을 인도하고, 시인은 시의 세계를 향해 시를 쓴다.
현실의 세계와 시의 세계 사이에서 시인은 살고 있다. 그는 시의 세계를 대리한다. 그는 시의 세계를 위해 시를 쓴다. 시는 시인을 떠나 시의 세계로 가버리고 시인은 현실에 홀로 남는다. 두 세계의 가운데서 시인은 고독하다. 다음 순간 새로운 시가 그에게 오지만, 다시 그를 떠나 시의 세계로 가버린다. 그러면 시인은 다음의 시가 올 때까지 다시 고독하게 홀로 머문다.
한 편의 완전한 시를 보면, 마치 이 세상에 다른 시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시는 매번 새로운 것을 이야기한다는 인상을 준다. 말해진 장소 그곳에서뿐만 아니라, 동시에 모든 곳에서 이야기를 한다. 말의 비현실적 현실성은 대개 시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세계는 한 편의 시로 가득하다. 만약 다른 시가 나타난다 해도, 그 시는 한 편의 유일한 시처럼 작용한다. 하나의 시가 갖는 현재성, 시의 현존이 갖는 위대함은 너무도 절대적이어서 사람은 한 편의 시 앞에서 도저히 다른 시를 떠올릴 수가 없다. 완전한 시는 인간에게도 현재성을, 현존의 힘을 나누어준다. "한 편의 시는 무엇인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시 자체가 그 무엇인가다." (보들레르) 완전한 시는 최초의 것, 유일한 것이다. 다른 시들이 거기 있지만, 그들은 오직 침묵할 뿐이다./ (...)
2
고대의 시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시간은 시의 곁에서 흐르며, 시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로부터 흘러나온다. 시에 의해서 고대로부터 우리에게로 이어지는 시간의 통일성이 탄생한다. 고대의 시가 갖는 충만함은 이미 고대 시대에 우리의 시대인 미래로 넘쳐흘렀다. 그것은 억지로 앞으로 밀고나온 것이 아니다. 도래하는 것을, 그리고 자기 자신의 앞길을 비추었을 뿐이다. 고대의 시는 스스로의 움직임을 의식하지 못하는 채로, 자신의 빛 속에서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그것은 아직도 고대에 머물면서 동시에 우리와 함께 있다. 그런 시는 하나의 보편시간을 연상시킨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함께 나란히 공존하는 시간계를.
말은 이처럼 강력해서 탄생 이후 줄곧 스스로를 증거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렇다면 말은 죽음마저도 관통해야 하며 죽음 가운데서도 생존할 수 있어야 한다. 말은 삶을 모두 통과한 후 죽음으로 들어서기를 원한다. 삶에는 말을 위한 공간이 충분하지 않다. 그리하여 인간은 말로 인하여 불멸이 된다.
〔21〕 시의 선험성
1
시는 시인 자신의 개성에 기인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 구조에 속하는 다른 모든 성질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미리 주어진 선험성에 기인한다. 하지만 오늘날 그 사실은 잊혀버렸다. "우리는 모든 만물을 완성된 상태로 갖고 꿈같은 천상의 정상에 자리 잡은 채 우주를 굽어보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가 태어난 것은 신의 발아래, 신들의 옆자리로 향하는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기 위해서다." (장 파울)
시인은 그에게 미리 주어진 시의 선험성으로 시를 쓴다.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시가 거기 있다. 그것은 인간이 시를 쓰기 이전 세계의 시다. 그 시가 시인을 향해 울렸고, 시인을 향해 시로 왔다. 시인은 자신의 시로 대답한다. 그렇게 시인은 자신에게 미리 주어진 시를 현실로 불러낸다. 시인은 자기 자신이나 다른 인간들이 아닌, 미리 주어진 시와 대화를 하는 사람이다. 내가 슈티프터의 〈비티코〉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깨달았다. 이 세상에 가장 먼저 있었던 것은 시이고, 그 다음에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시의 선험성이란, 지나간 세대 혹은 당대의 시인들로부터 각각의 시인들에게 전달되는 시적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살아 있는 시인과 죽은 시인이 있기 이전에, 이미 모든 시인에게 앞서 주어진 것을 의미한다./ (...)
시인이 더 이상 선험성과 관련을 맺지 않을 때, 그는 금방이라도 꺼져버릴 대상을 다루듯이, 시적 상태를 붙잡아두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 그것이 오늘날 대다수 시의 풍경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시인이 특별한 행위를 통해 모든 어휘를 붙잡아야 한다고, 그래서 시 속에 머물게 만들어야 한다고, 시인은 항상 시를 통제하여 시가 시로 머물게 감시해야 한다고. 따라서 시인은 시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자유분방할 수 없다고. 설사 그러한 시가 우리의 기계적 세계를 온전히 묘사하고, 우리 존재가 처한 위협과 무위를 적절히 그려낸다 해도, 그래도 역시 그 시는 시인이 노력한 결과일 뿐이다. 시대의 산물로, 필사적인 노력이 요구되는 우리 시대에 걸맞은 산물로 나온 것이지, 시적 정신으로부터 유래한 것이 아니다.
시적 선험성이 없는 시인은 시의 정신을 붙들어놓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 이것은 현대 건축의 경우와 유사하다. 역학법칙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서 있을 수 있게 된 건물, 그 어떤 위대함도 없는 건물처럼. 그러나 역학법칙은 위대함이 있을 때 비로소 고양된다. 그래야만 위대함의 놀이가 되고, 더 나아가서 위대함이 자기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법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현대 건축이 보유한 역학법칙은 과도하게 완강한, 진지함의 시멘트 덩이다.
2
시적 선험성이 있는 곳에는 모든 시적인 내용을 넘어서는 과잉이 존재한다. 그것이 시를 응축시킨다. 시는 시인에게서 자유로이 풀려난다. 풀려난 시가 한 사람에게 찾아간다. 사람이 시를 찾아나설 필요가 없다.
시인에게서 풀려나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피조물처럼, 괴테의 시 "황혼이 내려와 가라앉았으니……"는 한 사람을 향해서 허공을 날아간다. 그것은 자율적인 피조물이지만 인간에게 친화적이다. 선험성의 과잉은 시를, 시인 자신의 개성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시적으로 만든다. 그것은 시인보다 먼저 시를 노래하며, 시인보다 더 오래 시에 남는다.
이 과잉은 시의 결함까지도 감싸안는다. 위대한 시라고 해도 그 안에는 결함이 있는데, 그것은 시의 결함이라기보다는 인간 내면의 단절과 관련 있는 인간 자체의 결함이다. 그리하여 예레미아스 고트헬프의 글에 있는 공백은 결함이 아니라 인간의 구조 자체로 인해 발생한 그 무엇, 고트헬프 개인이 아닌 인간 존재에게 주어진 그 무엇이 된다. 가뭄이 자연의 결함이 아니고 자연 자체의 한 부분이듯, 고트헬프의 공백도 그러하다.
이 과잉은 시를 해석 불가한 존재로 만든다. 시의 선험성은 인간을 태초에 있었던 시간, 원초적 상태로 데려간다. 원초적인 것은 창조와 직접 연관되기 때문에 해석이 불가하다. 과잉이 없으면 시는 한눈에 꿰뚫어보인다. 기계구조가 그러하듯이 투명하게 설명이 가능해진다.
완전한 시는 계속해서 노래한다. 자기 스스로 계속된다. 선험성과 원초성으로부터 출발하여 끊이지 않고 변화를 거듭한다. 항상 새로워지는 변화 속에서 항상 같은 말이 반복하여 나타난다. 그것은 같은 말이지만 동시에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매 순간 특별한 의미로 노래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매 순간 살아 있는 말이 된다. 마치 괴테의 시에서 변신을 거듭하는 연인처럼.
수천 개의 형태로 너는 모습을 숨긴다.
그러나 애인이여, 나는 언제나 금방 알아볼 수 있으니.
설사 마법의 베일로 네 몸을 덮을지라도
그 무엇보다도 현존하는 님이여, 나는 언제나 금방 알아볼 수 있으니.
저급한 시는 시간이 흐를수록 옆으로 밀려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진다. 예를 들어 데멜의 시는, 그의 사후 십여 년이 지난 후에는 더 이상 눈에 띄지 않았다. 그 어떤 비평가도 혹평을 퍼붓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과잉에 의해서 선험성이 시로 온다. 과잉에 의해서 시는 자신을 초월한다. 시는 세계를, 객체를, 자신에게로 끌어당긴다. 세계의 총량이 증가한다. 시에는 시가 호명하는 것보다 더 많은 객체가 있다.
시는 살아 있으며, 자신을 초월하여 다른 사물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는 성질을 통해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 것이다. 그러한 시는 시간의 찰나 너머로 자신을 싣고 간다. 그 시는 미래적인 것을 내포한다. "시인은 혼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항상 예견한다." (휠덜린) 일차 대전의 참혹함은 트라클의 시 몇 편에서 이미 예견되어 있다. 이런 종류의 시는 미래에 도래할 일들을 현재에 분명히 볼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이런 종류의 시는 현재의 시간을 미래로 전이하는 힘, 역사를 형성하는 힘을 가진다. 이런 종류의 시는 순전히 역사적인 사실을 시로 묘사함으로써, 또한 그것을 역사를 초월하는 영역으로 참여시킬 수가 있다. 한 예로 베르길리우스가 유년기를 찬양할 때, 그 찬양은 분명 황제의 아들을 위한 것이지만, 찬양 스스로가 베르길리우스를 넘어서서 앞으로 세상에 태어날 신의 아들인 예수에게까지 다다르게 된다.
시의 선험성이 결여된 시에는, 시적인 특별함 자체가 없다. 오늘날 많은 시들은, 자신들이 표현하는 것이 우연히 말이라는 질료 속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시가 되어버린 듯하다. 그렇다면 다른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같은 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어떤 행위를 통해, 어떤 수학 공식을 통해, 어떤 기술의 메커니즘을 통해. 그런 경향은 시를 평준화시켜 저급한 수준의 시가 탄생하는 바탕을 마련한다. 시는 오직 시로서만 가능하다는 독점적 위치는 선험성과의 결합에서 형성되며, 거기에서부터 시의 특별한 본성이 시작된다. 오늘날의 시는 불안하다. 시가 더 이상 자신만의 특성을 갖지 못한 채 다른 수단으로 얼마든지 교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시의 특성으로 정당한 자격을 획득하지 못한 시는, 독재자의 권력어 아래서 억압당할 수 있다. 그 시는 시로서의 확고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괴테, 휠덜린, 트라클의 시는 권력어를 넘어 스스로 계속해서 노래하게 될 것이다.
시적 선험성과 관련을 맺지 못한 시들은, 자기들끼리의 구분도 희미하다. 그들은 설사 다른 시대에 다른 시인에 의한 것이라 해도 결국 서로가 비슷하게 중복된다. 그들은 독창적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단순한 팽창, 단세포 생물처럼 반복적인 세포분열을 통해 자신을 증가시켜나가는 집적물에 불과하다. 개인조차 이러한 응집의 영향 아래 파묻혀버린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아주 기묘하게 왜곡된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시는 말하자면 수평적인 선 위에서 증식한다. 반면에 선험성의 시는 수직으로 상승하며 성장한다. 그런 식의 수직 성장에서는 일상적인 차원의 수평적 흐름이 중단되고 만다. 원천으로부터 끊임없이 솟아나오는 공급이 있으므로 모든 시는 최초의 시, 그 원천을 떠나 최초로 인간에게 가닿은 시가 되는 것이다. 진정한 시인들은 선험성이란 근원으로 서로 연결된다. 그런 이유로 한 명의 인간이 이태백이나 롱사르, 혹은 휠덜린과 같은 다양한 색채의 시인들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3
(...)/ 선험성 앞에서 시인의 개성은 덜 중요하다. 선험성의 힘이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선험성으로부터 기인하는 모든 효과가 크면 클수록, 즉 태초의 상태와 가까울수록, 시인의 개성은 더욱더 뒤로 물러난다. "창작자가 자신을 오직 객체 중의 객체로 기억하는 그리스 시대의 예술에서는, 개인의 자기망각은 종종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미네르바의 방패에 돌을 던지는 늙은 남자로 스스로를 새겨넣은 페이디아스처럼, 자신을 겸손하고도 무의미하게 표현한 후대의 예술가는 없었던 것이다." (장 파울)// (...)
이 선험성, 미리 주어진 객관성은 그러나 오늘날의 시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것이 떠나간 시의 빈자리를 공허가 대신 채우고 있다. 하지만 선험성의 결핍을 알아차리는 사람조차도 많지 않다. 만약 시인이 그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그의 시는 텅 빈 결핍을 맴도는 노래가 된다. 릴케는 이러한 결핍을 노래한다. 시인의 곁에서 결핍은 스스로 노래한다. 릴케는 선험성이 빠져나가버린 빈 공간을 지니고 다닌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 공간을 이미 버렸다. 릴케의 시를 읽으면 우리는 그가 결핍된 것, 즉 시의 선험성을 가질 수고 있었으나 스스로 원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는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 더 이상 객관적-시성이 없는 시대의 시인이 되고자 했다. 릴케는 의식적으로 태어나지 않은 채 머물렀던 시인이다. 시대 전체가 태어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고결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한다. 릴케의 시가 주는 아름다움 덕분에 공허와 아득한 심연이 하찮은 것이 되어버리지 않았느냐고. 심연의 언저리에서 심연을 노래한 시 덕분에, 심연이 더 이상 위험하고 위협적이지 않게 된 것 아니냐고. 심연은 아름다움으로 둘러싸이고, 그리하여 진정한 의미에서 매혹적인 대상으로 변하지 않았느냐고. 심연은 아름다움의 동기인 셈이므로, 결국 매혹으로 가득한 무엇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단테와 같은 중세의 시인도 지옥의 나락을 아름다운 시구로 노래했다. 하지만 거기서의 아름다움은, 비록 그것이 심연의 아름다움이라 해도, 역시 신이 창조한 그대로의 아름다움이었다. 심연은 심연으로 현존했다. 시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심연이 솟아오른 것은 아니었다. 릴케의 경우처럼 심연이 아름다움 안에서 녹아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릴케에게서 보이는 초조함과 불안의 기색은, 진실한 삶을 살고자 원했던 시인 릴케가 심연의 공포와 시의 아름다움 사이에 놓인 균열을 느낀 탓인지도 모른다. 그는 심연을 앞에 두기를 원했고, 아름다움에 취한 상태에서 그 심연에 대한 공포 자체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시 안에서의 잃어버림 이상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 행위였다.
내 별이 올라왔다
내 발 아래 깊은 곳에.
나의 여우는 겨울에 어디에 집을 짓는가,
나의 뱀은 어디에서 잠이 드는가?
(파울 클레)
별은 더 이상 하늘에서 보이지 않고 "아래"를 파고들어간다. 이렇듯 자신을 파묻고 숨어버리려 하는, 아예 땅속으로 사라져버리려는 시인들이 종종 있다. 그러나 반대로 사르트르의 문학, 혹은 사르트르 유의 문학은 결핍과 공허를 상업화한다. 그런 문학은 이제 일반적인 영리활동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것은 공허의 타락이다.
4
시의 선험성, 시의 사물성은 어떻게 시인에 의해서 재발견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것들을 다시 불러낼 수 있을까? 만약 인간의 기본구조에 속하는 다른 원초적인 현상들, 종교, 인간, 자연, 민족과의 관계가 다시금 자명한 형태로 인간의 질서 속에 자리 잡게 된다면, 그러면 시 또한 선험성을 향해서 시선을 돌릴 것이고, 더 나아가서, 시의 선험성이 스스로 선명해져서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단계에 이르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될 가능성은 있지만, 그 가능성만으로는 실재하는 결핍 앞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다. 가능성은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가 없다. 결핍은 너무도 거대하고 너무도 심층적이어서, 상황을 장악하는 것은 결핍이지, 미약한 가능성이 아니다. 결핍의 실재는 강력하므로 인간은 그 앞에서 멈추어야만 한다. 결핍은 인간의 눈길을 강력하게 사로잡아 결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계속해서 인간의 눈길이 공허를 응시하게 된다면, 시선으로 공허를 둘러싸게 된다면, 텅 빈 공허에는 경계가 발생한다. 결핍된 선험성이 스며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형성된다. 인간이 결핍을 극히 진지하게 다룬다면, 선험성의 결핍으로 인해 자신의 구조에 병적 상태가 발생했음을 매 순간 진지하게 인식한다면, 그의 진지함은 그의 진실성을 통해 태초의 진리, 창조의 진리로 가닿는다. 그리고 그로 인해 마침내는, 원초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선험성으로 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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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피카르트
1888년 스위스 국경 지역, 바덴 지방의 쇼프하임에서 스위스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킬, 뮌헨, 베를린 프라이부르크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하이델베르크 대학병원 보조의사로 일했다. 기계화된 의학산업이 스스로에게 맞지 않다고 여기고 의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최후의 인간』, 『침묵의 세계』, 『파괴된 파괴할 수 없는 세계』, 『현대예술에서의 원자화』, 『말과 잡음어』, 『인간의 원자화』 등이 있다. 1952년 헤벨문학상을 받았다. 1965년 루가노 근처의 소렌고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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