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동승 - 하종오

공산(空山) 2023. 12. 28. 15:22

   동승同乘

   하종오

 

 

   국철을 타고 앉아 가다가

   문득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들려 살피니

   아시안 젊은 남녀가 건너편에 앉아 있었다

   늦은 봄날 더운 공휴일 오후

   나는 잔무하러 사무실에 나가는 길이었다

   저이들이 무엇 하려고

   국철을 탔는지 궁금해서 쳐다보면

   서로 마주 보며 떠들다가 웃다가 귓속말할 뿐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모자 장사가 모자를 팔러 오자

   천 원 주고 사서 번갈아 머리에 써 보고

   만년필 장사가 만년필을 팔러 오자

   천 원 주고 사서 번갈아 손바닥에 써 보는 저이들

   문득 나는 천박한 호기심이 발동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황급하게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국철은 강가를 달리고 너울거리는 수면 위에는

   깃털 색깔이 다른 새 여러 마리가 물결을 타고 있었다

   나는 아시안 젊은 남녀와 천연하게

   동승하지 못하고 있어 낯짝 부끄러웠다

   국철은 회사와 공장이 많은 노선을 남겨 두고 있었다

   저이들도 일자리로 돌아가는 중이지 않을까

 

 

   ―『국경 없는 공장』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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