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철 38

빙원의 끝

빙원의 끝 -- 아내에게 신대철 눈과 얼음과 눈보라 순록떼가 지나간다. 나도 나를 다 거느리고 얼음사막을 떠날 때가 되었다. 빙원 끝에 하얗게 한 사람이 어린다. 나를 무한히 풀어주고 무한히 기다리는 사람, 내 대신 얼어 있고 꿈꾸고 눈물 흘리는 사람, 내 안에서 밖으로 나갔다가 조용히 돌아와 잠드는 사람, 가만히 품고 있으면 고른 숨결소리만 남는 사람, 그 숨결로 가고 싶다. 그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그 숨결로 안에서 밖으로 나왔다가 환하게 되돌아갔던 것처럼

신대철 2015.12.23

넉배 고란초

넉배 고란초 신대철 그곳이 어디든 떠돌다 버려지면 넉배로 가는 길이 보인다. 물어서 갈 수 없고 몸보다 앞서서는 이를 수 없는 넉배, 배도 유민도 흘러가고 배턱만 갈대에 기대어 흔들리는 거기서는 쏟아지는 눈 그치고 망설이다 퍼붓는 눈, 사이사이 어두운 눈 휩쓸리는 막다른 골길 화약창 한 귀퉁이 움막에는 아범이냐, 하고 문 열어제치는 할머니, 쫓기는 아들 한번 스치려고 인공 때 대치 참나무댕이에서 막걸리 빚고 주먹밥 뭉치던 손 비집고 터져나오는 기침 소리, 애끓는 소리 가라앉지 않아 온 산판을 헤매면서 사방에 육남매 두고 거기 흩어져 살다 버려진 마티 할머니 남은 숨결, 잎 뒤에 볼록 튀어나온 화약 종이 같은 홀씨 주머니에 따스히 감싸안는 고란초, 바람받이 바위벽에 살 수도 죽을 수도 없는 뿌리를 내린다.

신대철 2015.12.23

반딧불 하나 내려보낼까요?

반딧불 하나 내려보낼까요? 신대철 상처 깊숙이 노을을 받는 그대, 훌쩍 바람이나 쐬러 올라오시죠. 때 없이 가물거나 가물가물 사람이 죽어가도 세상은 땅에서 자기들 눈높이까지, 한걸음 윗세상은 빈터 천집니다. 여기서는 누구나 무정부주의잡니다. 여기서 미리 집 없이 사는 자가 되어보고, 저 아래 이글거리는 땅 사람 그대를 둘러보고 여름이 다 끝날 때 내려가시죠. 풀벌레가 울기 시작합니다. 다시 길을 낼까요? 초저녁 한적한 물가나 무덤가로 나오시면 푸른 반딧불 하나 내려보내겠습니다.

신대철 2015.12.23

극야

극야 ㅡ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1 신대철 서울이나 평양에서 오지 않고 사우스 코리아나 노스 코리아에서 오지 않고 우리가 어린 시절 맨 처음 구릉에 올라 마주친 달빛을 눈에 가슴에 다리에 받아와 꿈을 뒤척이던 그 금강 그 개마고원에서 온 날은 구름에 살얼음이 잡히고 광륜을 단 두 개의 달이 마주 떠 얼음 안개 속을 스치는 화살 다리를 비추고 있었던가요. 화살 다리* 그 아래 낮은 판잣집 지붕 밑에서 에스키모들은 술과 마약과 달러와 민주주의에 취해 잠들어 있었고 우리는 빙평선을 사이에 두고 무엇을 찾으려 했던가요. 그날 나도 모르게 다가가 어디서 오셨느냐고 묻자 당신은 '개마고원요' 하고 얼어 있는 나와 갑자기 내 뒤에서 저절로 맞춰진 우리의 환한 얼굴까지 함께 보았지요. 그때 나는 비로소 우리가 서로 幻..

신대철 2015.12.23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4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4 신대철 극지에서 극지로 떠돌면서 눈과 빙하와 몽골 반점만 남아 Sam and Lee*로 돌아왔습니다. 산청에서 온 요리사 송씨가 본토 어디서든 Sam, 혹은 Lee로 살아보려고 하루 2교대, 요리 책을 넘기며 밤일을 하고 당신이 얼음 구름 속으로 들어간 해를 끼고 언 호수를 건너 에스키모 숙소로 돌아가다 환하게 어른거리는 그림자, 훈훈한 사투리에 다리를 후들거리며 어깨가 쏠린 채 돌아서는 곳, Sam and Lee, 목조 건물 2층, 건조실 같은 다락방, 밖으로 난 계단으로 올라가 꽝꽝 두드려야 열리는 문. 송씨는 슬리핑 백에 사지를 집어넣고 노란 손때 묻은 구인광고 신문을 뒤집어쓰고 불을 켠 채 잠들어 있습니다. 88올림픽 포스터 밑에는 넘치는 깡통 요강, 신지 않은 월드컵..

신대철 2015.12.23

금강의 개마고원에서

금강의 개마고원에서 --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2 신대철| 허영호와 뵈르게*가 극점을 향해 가고 있을 동안 산정에 떠오른 하루살이 영혼들을 삼림 한계선에 날리고 북극해가 몸부림친 대로 얼어붙은 빙원에서 우리는 새도 나무도 없는, 길 없는 거리로 들어섰습니다. -33도, -23시 모든 시간은 태초로 되돌아가고 툰드라엔 광물질만 남는 고독, 휘몰아치는 폭풍설 우리는 동네 전체를 휘말아 핀 소용돌이 눈꽃 속에서 손목이 마비되는 줄도 모르고 가족 사진을 바꿔보았습니다. 사진 몇 장을 나란히 맞추면 풍경 가득히 넘치던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당신의 아이는 강가에서 내 아이는 고원에서 마주보고 웃고 웃었던가요. 온 곳도 갈 곳도 잊고 우리는 금강의 개마고원에서 개마고원의 금강으로..

신대철 2015.12.23

지리산 소년

지리산 소년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5 신대철 지리산 기슭 두더지 들쑤시고 간 논둑에 고무신 벗겨진 채 동구 밖을 향해 서 있던 소년을 흑백 사진 한 장에 구겨가지고 나와 서울과 나성 뒷골목을 굴러굴러 지구 꼭대기로 올라온 Sam, 혹은 Lee, 오늘은 잠시 갈 길을 버리고 자신이 선택한 나라에서 다시 자신을 선택하려고 지리산 소년과 마주앉아 암흑 속에서 따스한 논물 소리를 찰랑이며 귀기울이고 있습니다

신대철 2015.12.23

노란 얼음꽃

노란 얼음꽃 -개마고원에서 온친구에게8 신대철 폭풍설에 쫓겨 기어들어간 곳, 수퍼마켓은 바겐 세일이 한창이었습니다. 사발 2달러 75센트 가죽 장갑 9달러 50센트. 첫눈에 든 장갑이 불량품, 메이드 인 코리아였습니다. 그냥 가려다 기념으로 장갑 하나씩 사 들고 우린 그냥 즐거웠습니다. 어리둥절한 점원에게 우리도 같은 제품이라고 농을 걸며 마음놓고 함께 웃었습니다. 물건을 바꾸러 온 육이오 참전 용사도 덩달아 웃었습니다. 그런데 그 용사가 웃고 서 있던 자리에 이상한 침묵이 돌았습니다. 서울과 평양에서 온 침묵을 사이에 두고 우린 말없이 매장을 겉돌았습니다. 침묵을 무엇으로 바꾸고 싶었던가요, 토산품 코너에 기대어 순록 가죽으로 만든 탈을 쓰고 이누피아트 같으냐 몽골리안 같으냐고 묻던 당신, 그게 바로 ..

신대철 2015.12.23

누가 살고 있다

누가 살고 있다 신대철 북한산은 올라갈 대로 올라가 다른 산을 향해 봉우리를 내밀고, 지붕 위에서 거리로 쏟아지는 연둣빛 햇살 누가 살고 있다 지도 위의 온갖 지명을 지나 새나 드나드는 비탈에 밭을 붙이고 물소리에 눈 트이며 누가 살고 있다 사람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잡목숲을 주위에 뭉쳐놓고 사람의 피가 도는 제 숨결을 무서워하며 귀기울이고 있다 번지는 풋풋한 사람 냄새

신대철 2015.12.23

또 무슨 일이지?

또 무슨 일이지? 신대철 또 하루 밭일을 끝내고 날개 다친 새를 기다린다. 들쥐에 몰려가다 내 품에 뛰어든 눈빛이 뜨거운 새, 고구마 덩굴 속을 기어가 손을 내밀자 부리를 비비고 깃을 접던, 몇 번 날고 날다 아까징끼 가슴에 묻혀 합대나무 가지에 걸리던 뜨내기새, 또 하루 지나 새는 보이지 않고 후르르르 리요 새 울음 소리 한 줄기 손 끝에 스치다 스민다. 손 끝에 맺히는 울음, 한 방울.

신대철 2015.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