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철 38

가을이 오면

가을이 오면 신대철 가을이 오면 소승폭포, 바람불이, 물돌이동 한곳으로 나란히 붙여 그곳에 숨구멍 내고 물방울로 숨 쉬리 그냥 스쳐가는 이 얼굴 마주쳐 보고 아무 길이나 물으면서 아무 길이나 함께 서 있으리 눈에 가슴에 묻힌 이야기 들추어 하, 참, 세상에, 그렇지요 맞장구치는 소리 울려 들으리 햇빛은 햇빛대로 쓸리고 겹그림자 나누어질 때 그곳에 온 가을을 멀리 돌아 내게로 돌아오리, 있을지도 모를 내게로

신대철 2015.12.23

사이2

사이 2 신대철 그녀의 고향은 경흥이 아니라 함흥 동갑내기가 아니라 두어 살 아래 그러나 무슨 상관이랴! 정들이면 누구나 한통속이 되는 것! 오늘 밤도 나는 그녀와 국경을 다시 넘는다. 중국에서 험하게 살다 아랫도리가 헤진 채 남쪽에 내려온 딸 이야기를 아프게 들으면서, 딸이 준 돈으로 국경수비대의 안내로 가슴까지 차오르는 두만강을 유유히 건너면서, 잊으시라, 잊으시라, 같은 말만 되풀이 한다. 그녀는 아들 둘을 두고 내려왔다. 금시 따라올 줄 알았는데 어느새 5년, 북쪽에서는 아무 기별이 없다. 딸은 애를 못 가져 이혼 당했고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고 그녀는 하루해를 북쪽으로 넘기는 게 두렵다. 그녀의 꿈은 어디서든 다시 가족이 한 지붕 밑에 모여 사는 것. 저녁 상에 들어앉아 함께 들판을 보고 함께 들..

신대철 2015.12.23

한탄강1

한탄강 1 신대철 평야 깎아질러 벼랑 사이로 흐르는 한탄강 피난 행렬 속으로 신발 한짝 찾으러 간 아이 신발도 발목도 잃고 백발로 협곡으로 돌아와 빈 지게 어깨에 걸고 흙바람 품어 안고 강 건너 마실 간다 아이들 몰려가다 사라지고 수수밭 술렁거리다 사라지고 포대 진지 넘어 작대기 질질 끌린 길만 돌아온다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창비 2005.

신대철 2015.12.23

추운 산

추운 산 신대철 춥다. 눈사람이 되려면 얼마나 걸어야 할까? 잡념과 머리카락이 희어지도록 걷고 밤의 끝에서 또 얼마를 걸어야 될까? 너무 넓은 밤, 사람들은 밤보다 더 넓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즐거워하는 사람들 이름을 붙여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들 이름으로 말하고 이름으로 듣는 사람들 이름을 두세 개씩 갖고 이름에 매여 사는 사람들 깊은 산에 가고 싶다. 사람들은 산을 다 어디에 두고 다닐까? 혹은 산을 깎아 대체 무엇을 메웠을까? 생각을 돌리자, 눈발이 날린다. 눈꽃, 은방울꽃, 안개꽃, 메밀꽃, 배꽃, 찔레꽃, 박꽃 나는 하루를 하루종일 돌았어도 분침 하나 약자의 침묵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들어가자, 추위 속으로. 때까치, 바람새, 까투리, 오소리, 너구리, 도토리, 다람쥐, 물

신대철 2015.11.20

나는 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네

나는 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네 신대철 평지 끝에서 산속으로 쫓겨 들어온 그해 겨울, 물소리도 끊긴 옻 샘에서 얼음 숨구멍을 쪼던 까만 물까마귀와 마주쳤네. 물까마귀는 나를 깊이 지켜보았고 나는 한눈 팔며 주춤거렸네. 더 쫓길 데 없어 아주 몸속으로 기어들고 싶었네. 몸 속, 기어들면 영혼이 비치지 않는 곳에서 살고 싶었네. 겨울 가고 겨울 바위틈에서 물까마귀 언 발자국만 남기고 사람도 산도 잊고 한데에서 나는 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았네.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 문학과지성사, 2000.

신대철 2015.11.19

수각화(水刻畵) 1

수각화 1 신대철 떠돌던 이 맨 손으로 들어와 폐병 고치고 비운 산막에 나도 맨 손으로 들어와 문지방에 걸터앉았다. 구멍 숭숭 뚫린 지붕, 번개무늬 흙벽 산길 내려오는 그늘 진 비탈을 뒤틀어 오르는 참나무들, 사이사이 얼비치는 빛살 놓치지 않고 살아야지, 갈대밭에 논 다랑이 치고 물 대고 살아야지, 바람 드는 길목에 밭 한 뙈기라도 둬야지 사람이 그리운 골짜기에 불지르고 서해안으로 치솟는 불길 휘어 사방에 불씨 남기는 맞불 놓고 온몸으로 안아 얼어터진 물웅덩이로 몰고 가야지, 물소리는 물로 밀어내고 바람소리는 바람으로 쓸어내고 수각화(水刻畵) 1-1 안골 합대나뭇골 두 골물 아우러지는 물모퉁이에서 보송보송한 나무눈 들여다보고 나무도 모르게 뿌리를 내린다. 바위틈에 엉키는 잔뿌리들 얽으니 나는 고로쇠나무 ..

신대철 2015.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