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너와집 한 채 - 김명인

공산(空山) 2015. 11. 16. 23:14

   너와집 한 채
   김명인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 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잣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붙는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 넣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는 황토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아주 잊었던 연모 머리 위의 별처럼 띄워놓고

   그 물색으로 마음은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겠네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
   매봉산 넘어 원당 지나서 두천
   따라오는 등 뒤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겠네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


   ―『물 건너는 사람』 세계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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