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1046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내가 읽은 시 2015.12.01

누란樓蘭 - 김춘수

누란樓蘭 김춘수 ​ 과벽탄戈壁灘 고비는 오천리 사방이 돌밭이다. 월씨月氏가 망할 때, 바람 기둥이 어디선가 돌들을 하늘로 날렸다. 돌들은 천년만에 하늘에서 모래가 되어 내리더니, 산 하나를 만들고 백년에 한 번씩 그들의 울음을 울었다. 옥문玉門을 벗어나면서 멀리 멀리 삼장법사 현장도 들었으리. 명사산鳴沙山 그 명사산 저쪽에는 십년에 한 번 비가 오고, 비가 오면 돌밭 여기저기 양파의 하얀 꽃이 핀다. 봄을 모르는 꽃. 삭운朔雲 백초련白草連. 서기 기원전 백이십 년. 호胡의 한 부족이 그 곳에 호戶 천오백칠십, 구口 만사천백, 승병勝兵 이천구백십이 갑甲의 작은 나라 하나를 세웠다. 언제 시들지도 모르는 양파의 하얀 꽃과 같은 나라 누란 ------------------------------- 3800년간 ..

내가 읽은 시 2015.12.01

풀이 자라는 쪽 - 김순애

풀이 자라는 쪽 김순애 풀들은 위로 자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잘려도 개의치 않는 쪽으로 자란다. 또한 풀들은 마디를 갖고 있다지만 잘린 부분이 가장 큰 마디가 된다. 마당가 풀을 낫으로 베어놓고 며칠 후면 금방 자란다. 낮은 공중만큼 기름진 밭도 없을 것 같다. 넓은 광장이 자라는 밭 넓은 공터가 자라는 공중의 밭 풀은 몰래 자란다. 무엇을 감추기도 잘한다. 그 속을 헤집어보면 깨진 사금파리도 들어있고 초봄에 내린 비의 뿌리도 들어있고 풀빛 뱀도 들어있다. 그러나 벌레는 없고 벌레들 소리만 들어있기도 하다. 달은 빈 쪽으로 자라고 둥근 쪽으로 빠져나간다. 손톱은 늘 잘라지는 쪽으로 자란다. ―《시에》2015. 겨울호

내가 읽은 시 2015.11.30

성북동 비둘기 -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김 광 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1번지 채석장에 도루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

내가 읽은 시 2015.11.25

한 잎의 여자 - 오규원

한 잎의 여자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 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王子가 아닌 한 아이에게』1978.

내가 읽은 시 2015.11.25

맨발 - 문태준

맨발 문태준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

내가 읽은 시 2015.11.25

담쟁이 - 도종환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잎 하나는 담쟁이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내가 읽은 시 2015.11.23

나무의 유적 - 이은재

나무의 유적 이은재 남산동 허름한 식당 구석진 자리 통나무의자 하나 앉아 있다 나이테로 걸어온 백년 나무 유적을 만난다 나무의 생은 둥글지만 끊어질 듯 이어지는 꿈길 있어 나무는 쉼 없이 걸었으리라 꽃 피는 오솔길 천둥 치는 들판 술 취한 모롱이 돌아 언 강에 발목 빠뜨렸으리라 갈수록 좁아지고 어둑해지는 골짜기 길을 잃기도 했으리라 푸른 날들이, 제 몸에 새겨 넣은 파문이 하얗게 마르고 있다 나는 동그랗게 앉았다 ―『나무의 유적』 그루, 2014.

내가 읽은 시 2015.11.19

참깨를 털면서 - 김준태

참깨를 털면서 김준태 산그늘 내린 밭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 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 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온 나로선 기가 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댄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 번만 기분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내가 읽은 시 2015.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