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깻잎을 묶으며
유홍준
추석날 오후, 어머니의 밭에서
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깻잎을 딴다
이것이 돈이라면 좋겠제 아우야
다발 또 다발 시퍼런 깻잎 묶으며 쓴웃음 날려보낸다
오늘은 철없는 어린것들이 밭고랑을 뛰어다니며
들깨 가지를 분질러도 야단치지 않으리라
가난에 찌들어 한숨깨나 짓던 아내도
바구니 가득 차오르는 깻이파리처럼 부풀고
맞다 맞어, 무슨 할 말 그리 많은지
소쿠리처럼 찌그러진 입술로
아랫고랑 동서를 향해 연거푸 함박웃음을 날린다
어렵다 어려워 말 안 해도 빤한 너희네 생활,
저금통 같은 항아리에 이 깻잎을 담가
겨울이 오면 아우야
흰 쌀밥 위에 시퍼런 지폐를 척척 얹어 먹자 우리
들깨냄새 짙은 어머니의 밭 위에 흰 구름 몇 덩이 지나가는 추석날
동생네 식구들이랑 어울려 푸른 지폐를 따고 돈다발을 묶어보는
아아, 모처럼의 기쁨!
-------------------------
* 유홍준 : 1962년 경남 산청 출생. 1998년 《시와반시》로 등단. 시집 『상가(喪家)에 모인 구두들』 『나는, 웃는다』 『 저녁의 슬하』, 『너의 이름을 모르는 건 축복』 등 출간. 이형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청마문학상 등 수상.
'내가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붕을 연주하다 - 전순복 (0) | 2021.09.21 |
---|---|
송편 - 고영민 (0) | 2021.09.20 |
개암에 얹는 이야기 - 임재정 (0) | 2021.09.17 |
가물가물 불빛 - 최정례 (0) | 2021.09.17 |
벌초 - 이재무 (0) | 2021.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