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지붕을 연주하다 - 전순복

공산(空山) 2021. 9. 21. 20:24

   지붕을 연주하다

   전순복

 

 

   음표들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조율되지 않은 현악기가 불협화음으로 흐른다

 

   루핑쪼가리와 판자로 덮은 지붕 사이를 뚫고

   안단테로 내려오던 음표들이 포르테로 퍼붓기 시작하면

   크고 작은 그릇들이 놓여진다

 

   비가 더욱 거세지고

   독주곡과 실내악이 제각각 방안 가득 어우러지면

   지붕에 올라간 아버지가 지휘봉을 뚝딱 두드리며

   이제 어떻노?

   소리쳐 물어보고

   머리에 수건을 쓴 어머니가 안팎을 들락거리며

   아니라예!

   이제 됐네요!

   지붕을 향해 대답하고

   이 학기 음악책을 넘기며 노래를 부르던 언니와 나는

   음표가 가득 찬 양동이를 수챗가로 들고갔다

   온몸에 비를 맞으며 선율을 조절하던 아버지가

   이제 어떻노?

   다시 묻고

   음표를 잔뜩 덮어쓴 어머니가

   이제 됐네예!

   도돌이표로 대답하면

 

   아버지의 지휘봉에 서서히 연주가 멈추던

   내 나이, 초여름의 소나타

   

 

   ― 『지붕을 연주하다』(시와소금,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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