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시

가물가물 불빛 - 최정례

공산(空山) 2021. 9. 17. 06:59

   가물가물 불빛

   최정례

 

 

   당신과 이젠 끝이다 생각하고 갔어
   가물가물 땅속으로 꺼져갔어

   왕릉의 문 닫히고
   석실 선반 위에 그 불빛
   얼마 동안 펄럭였을까
   왕이 죽고 왕비가 죽고
   나란히 누운 그들
   칼을 차고 금신발을 신고
   저승 벌판을 헤맬 동안
   그 불꽃 혼자 어떻게 떨었을까

   당신 나 끝이야
   이젠 우리 죽은 거야

   가물가물 마지막 불빛 사윈 다음
   또 몇 세기를 캄캄히 떠내려갈까
   금관도 옥대도 비스듬히 쓰러졌지

   다 무너지고 무너져서
   왕비 어금니 하나 반짝 눈떴지

   얼마를 헤매게 될까
   당신이 있는 세상 거기
   그래도 봄이면 새풀 돋겠지
   삐죽삐죽 솟고 무성해지다
   냇물은 소리치며 돌아 내려가겠지
   당신 나 잊고 나도 당신 잊고

 

 

  붉은 밭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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