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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한 날

풀이 무성하게 자란 묵은 밭에서 풀을 베다가 꿩알을 발견하였다. 모르고 주위의 풀을 거의 다 베어 버린 건 나의 실수였으나, 예초기 날에 꿩알들이 한 개도 다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놀라서 날아갔을 어미가 다시 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한참 후에 가봤더니 특유의 보호색과 검불로 감쪽같이 위장한 어미는 다시 알을 품고 있었다. 사진을 찍으려고 가까이 다가가도 꼼짝하지 않는 저 끔찍한 모성애! (아래 두번째 사진에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을 품고 있는 까투리가 있는지 잘 모른다.) 풀을 베고 사진까지 찍었으니 까투리와 장끼 부부에겐 이래저래 미안한 날이었다. 그늘이 없어졌으니 알을 품는 어미의 등은 땡볕에 얼마나 뜨거울까. 아무쪼록 알들이 모두 무사히 부화해서 아홉 꺼병이들이 ..

텃밭 일기 2015.06.23

여기는 백록담

한참동안 구름 걷히기를 기다린 끝에 눈앞에 드러난 백록담은, 그저께 밤부터 어제 아침까지 한라산에 200mm나 내린 비 덕분에 물이 많이 차 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저 아래쪽 산언저리와 바닷가엔 서너 번 다녀간 적은 있으나 여기까지 오르기는 이번이 처음이라, 뒤늦게 소원 하나는 이룬 셈이다. 때마침 밤새 내리던 비도 아침에 그쳐 쾌적한 날씨다. 성판악에서 7시 반에 출발하여 5시간을 걸어 올라왔다. 올라오는 동안 정지용 시인의 오래된 시 을 생각했다. "絶頂에 가까울수록 뻑국채 꽃키가 점점 消耗된다. 한 마루 오르면 허리가 스러지고 다시 한 마루 우에서 목아지가 없고 나종에는 얼골만 갸웃 내다본다. 花紋처럼 版박힌다. 바람이 차기가 咸鏡道 끝과 맞서는 데서 뻑국채 키는 아조 없어지고도 八月 한철엔 흩어..

바위가 있는 나의 텃밭

부모님 평생의 땀이 배어있고 내가 또 가꾸어가야 할 터전인 집앞 텃밭 입구엔 간판처럼 또는 기념비처럼 우뚝 선 바위가 하나 있다. 내가 십 년쯤 전에 축대를 쌓고 경지정리를 하면서 중장비를 동원하여 이 바위를 세웠는데, 그 때 옆에서 지켜보며 이 아들을 대견해하시던 부모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때 심었던, 이 바위곁의 땅거죽을 잔디처럼 덮으며 번져가는 좀누운향나무는 이제 많이 자랐다. 아버지가 이십 년 전쯤에 심으신 단감나무도 바위와 썩 잘 어울린다. 조금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내가 가끔 나팔을 불 때 무대로 쓰거나 여럿이 앉아 새참이라도 먹으며 쉴 수 있는, 주목과 은행나무와 단풍나무, 노간주나무, 갈매나무 등으로 둘러쌓인 멋진 반석도 둘 있다. 또 여차하면 '이랴!'하고 걸터앉아, 일..

텃밭 일기 2014.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