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일기

옛 산길을 걸으며

공산(空山) 2024. 10. 29. 22:06

멀리서 팔공산을 쳐다보면 단풍이 중턱까지는 내려온 것 같다. 중턱까지 내려왔다는 것은 비로봉이나 동봉과 서봉 등의 주봉과 주능선에선 이미 단풍이 졌거나 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순환도로나 고향마을에도 단풍이 금방 내려올 것이다. 물론 단풍이 등고선을 따라 횡대로 줄을 서서 손을 잡고 내려오는 것은 아니다. 산에 자생하는 단풍과는 종이 다른 순환도로의 단풍나무는 대부분이 이미 물들었으며, 산가 마당의 감나무는 벌써 잎이 거의 다 떨어진 상태다. 아무튼, 오늘은 그 팔공산의 단풍을 구경할 겸 옛 산길을 걸으며 추억 속으로 한번 들어가보고 싶어서 아침에 집을 나섰다.

먼저 산가 마당에 주차를 하고, 며칠 전에 쪄서 비닐하우스 안에다 널어둔 콩대를 뒤집어 주고, 집에서 챙겨온 점심이 든 작은 배낭을 메고 등산을 시작했다. 평일이라 등산로는 한산한 편이었지만, 나는 일부러 더 한적한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한적하고 깊은 곳일수록 추억은 더 많이 깃들어 있을 테니까. 말이 오솔길이지 오래 묵혀져서 길은 거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곳곳에 나자빠진 아름드리 죽은 나무들이나 잡목과 덩굴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여기저기 모래땅이 드러난 민둥산에 사방사업으로 싸리와 아까시나무의 씨앗을 뿌리고 소나무를 심은 것이 불과 오십 년쯤 전의 일이다. 그리고 저 아래 민가들이 난방과 취사에 땔감으로 쓰던 나무를 등유와 LPG로 바꾼 지가 이삼십 년밖에 되지 않지만 숲은 그새 원시림처럼 울창해졌다. 천천히 옛 기억을 더듬어 깊은 계곡으로 들어갔다. 예전에 동네 이웃들이나 아버지와 함께 지게 지고 나무하러 오르내리던 바로 그 길을. 
 
으름덩굴이 아직도 예전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반가웠다. 가을에 열매가 익으면 바나나 같은 두꺼운 껍질이 벌어지는데, 그 속살을 입에 넣으면 얼마나 달고 맛이 있던지! 낙엽활엽 덩굴이지만 추위에 강해서 겨울이 와도 잎을 다 떨구지는 않는다. 지금은 숲이 너무 울창해져서 으름덩굴이 예전만큼 무성하지는 않았다. 그늘을 잘 견디는 식물이라 해도 키큰 나무들이 하늘을 너무 많이 가리면 세력이 약해지는 것이다. 저렇게 약해서야 어찌 열매를 주렁주렁 맺을 것이며 그것을 키우고 익혀서 찾아오는 산짐승들과 산새들에게 나눠줄 수 있을지,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멀리 씨앗을 퍼뜨리게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렇지만 숲은 모든 것들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화엄의 세계임에 틀림없다. 여기선 적어도 죄를 많이 지은 나무가 그 죄를 덮기 위해 또 다른 죄를 저지르거나, 결백한 나무에게 죄를 덮어씌워 끝없이 괴롭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속해 있지만 당장에라도 뛰쳐나가 버리고 싶은 몇몇 채팅방에서처럼 한두 사람의 무지몰각과 뻔뻔함이 판치는 곳도 아닌 듯하다. 숲은 또한 '악화가 양화를 몰아낸다'는 '그레샴의 법칙'이라던가 하는 경제 이론이 적용되는 공간은 더욱 아닌 것 같아서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 곳인가. 그러니 여기가 바로 다름 아닌 낙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예전의 그 자리에서 대를 이어 살고 있는 으름덩굴의 잎이 새파랗다.
길을 지우고 있는 쓰러진 나무들과 덩굴들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 있는 길을 따라가다 보니 앞에 웬 아치가 나타났다. 걸음을 멈추고 살펴보니 죽은 두 소나무가 쓰러져서 만든 멋진 문이었다. 추억의 낙원으로 들어가는 문. 나는 고마운 마음으로 그 문지방을 넘어 잡목을 헤치며 완만한 오르막길을 계속 올라갔다. 개울물이 땅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바위 틈을 졸졸 흐르며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그 맑은 물이 이끼 낀 바위 틈을 흐르며 작은 폭포를 만들고 다시 웅덩이를 만들어 낙엽을 띄우는 모습과 물소리는 얼마나 정겨운지! 그러고 보니 저 물소리를 너무 오래 잊고 살았던 것 같다. 
 

나무들은 쓰러져서 멋진 아치를 만들었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떠 있는 낙엽들이 정겹다.

이윽고 화사한 단풍 지대에 접어들었다. 다래덩굴은 이미 잎을 다 떨군 채 줄기만 앙상히 남아 겨울을 맞을 채비를 끝낸 것 같았다. 그 옆 낙엽 위에선 젊은 독사가 나를 잠깐 쳐다보더니 제 갈길을 바삐 가고 있었다. 그도 다래 덩굴처럼 이제 겨울을 맞이할 채비를 서둘러야 할 것이다. 언제 갑작스런 추위가 닥칠지 모르니까.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유혹의 말 한 마디 걸지 않고 뱀은 가버렸으니 내가 이 낙원에서 추방될 일은 없겠군.'
 
조금 더 올라가자 높고 넓고 가파른 암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너리청석'이라 불렀다. 기울기가 60도 정도는 되어서 로프에 매달리지 않고는 올라가기 어려운 곳이다. 여름에 소나기가 쏟아진 뒤에 멀리 산 아래서 이곳을 바라보면 거대한 폭포가 떨어지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이 절벽의 왼편(서쪽)엔 수직 절벽이 병풍처럼 서 있는데, 나는 그 수직 절벽 아래로 가서 바닥과 절벽이 만나는 모서리를 따라 산을 계속 오르기로 했다. 그 모서리엔 나무들이 많아 미끄럽지 않고 안전하니까. 그리고 절벽 위에서 갑자기 바위가 굴러떨어져 덮칠 것을 걱정할 만큼 나는 큰 죄를 지으며 살지는 않았다고 생각되니까.
 

다래덩굴과 독사
너리청석 서쪽의 수직 절벽
너리청석과 그 옆의 단풍

그렇게 잡목을 헤치고 가파른 비탈을 올라가고 있는데, 거너편 비탈에서 낙엽이 부스럭이는 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웬 낯선 새 한 쌍이 기어가다가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몸집이 매추리나 비둘기보다는 훨씬 크고 까투리보다는 작아보이는 새였다. 무척 온순하고 침착하며 금실이 좋은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오른쪽 바위 위의 새는 멱(목의 앞쪽)에 검은 털이 수염처럼 나 있어 수컷인 것 같고, 왼쪽 나무 둥치 앞의 새는 멱에 검은 깃털이 없이 다소곳해 보여 암컷인 것 같았다. 나중에 집에 와서 알아보니 이 새의 이름은 '들꿩'이었고, 암수 구별은 내 추측이 옳았다. 중부유럽과 시베리아, 한반도 전역에 사는 흔한 텃새라고 하는데, 나는 왜 지금까지 모르고 살아왔을까. 
 

들꿩 한 쌍
들꿩 수컷. 멱에 검은 수염이 있다.
들꿩 암컷. 멱에 검은 털이 없다.

 눈앞에 바위로 된 봉우리가 나타났다. 저 바위 봉우리엔 45년쯤 전에 친구와 함께 한번 다녀간 적이 있었다. 오늘은 내가 서봉쪽으로 올라가는 중이지만, 그때는 서봉에서 내려왔었다. 친구와 나는 '드라이진'이라는 독한 술이 담겼던 납작하고 작은 유리병에다 날짜와 이름을 쓴 쪽지를 넣어 마개를 닫은 다음 그것을 아무도 볼 수 없는 저 봉우리의 바위 틈에다 감추어 두었었다. 먼 훗날 다시 이곳을 찾아보자고 약속을 하며. 말하자면 타임캡슐이었던 셈인데, 그러고는 지금까지 한 번도 와보지 못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등산객이 많지 않을 때여서 이 바위에까지 사람들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었는데, 지금은 밧줄까지 드리워져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며 그 병을 발견하고는 치워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저렇게 두툼히 자란 이끼에 영영 묻혀 버렸는지도 모른다. 감춘 자리가 정확히 어디인지 지금은 기억할 수도 없지만.
 
그 바위 봉우리를 왼편에 두고 나는 계속 서봉을 향해 올라갔다. 바위들로 이루어진 능선인 만큼 거칠고 위험한 구간이다. 바위 틈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나무들이 나의 등산을 도와주었다. 몸통을 내 쪽으로 기울이거나 가지를 뻗어 주어 내가 그것을 안거나 잡고 발을 옮겨 디딜 수 있게 해주었다. 심지어 나무는 뿌리까지 드러내어 내 몸을 지지하고 끌어주어 무거운 나를 바위 위에 올라서게 해주었다.
 
서봉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노루의 배설물을 보고 나는 다시 옛날을 생각했다. 한겨울에 이 높은 곳까지 노루를 사냥하러 두어 번 왔었다. 포수는 고모부였고,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사촌 형과 나는 몰이꾼이었다. 노루는 높은 산 비탈의 눈 쌓인 응달을 좋아하는 습성이 있었다. 맞은편 비탈에서 총을 맞고 굴러떨어지던 노루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허탕 친 날은 산을 내려가다가 야산에서 토끼나 꿩을 사냥했다. 먹거리가 넉넉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때 먹어보았던 노루, 멧돼지, 꿩, 토끼 고기의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여기서 나는 갑자기 머리가 띵해져 오는 것을 느낀다. 그런 살생의 경험을 달콤한 추억으로 회상하고, 지금도 어떤 음식보다도 육식을 좋아하는 내가 아닌가? 그런 내가 낙원을 꿈꾸다니. 그 낙원에서 나는 그럼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바위 봉우리에 로프가 드리워져 있디.
바위 틈의 잣나무(왼쪽 사진)와 소나무들
내려다보이는 계곡과 비탈의 단풍이 곱다.
서봉이 눈앞에 보인다.
바위 위의 소나무와 노루 똥
연륜과 기품이 느껴지는 소나무

5,500보를 걸어 오후 1시경에 서봉에 올라섰다. 서봉엔 2022년 1월에 파계재에서 염불봉까지 주능선 종주를 할 때 왔었는데, 2년 9개월만에 다시 온 것이다. 서봉은 먼저 제 가슴팍의 바위 틈에 키운 구절초를 한 송이 내밀며 나의 방문을 환영해 주었다. 나는 평평한 바위 위에다 카메라를 얹어 셀프 사진을 찍었다. 서봉이 북풍을 막아주는 남쪽 비탈에서, 우산처럼 가지를 편 소나무 그늘 아래에서, 나는 배낭을 열고 점심을 먹었다. 해마다 이맘때의 도시락 메뉴는 비슷하다. 군고구마와 단감, 비스켓, 그리고 물 한 병.
 
내가 매일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금호강과 대구 시가지가 멀리 내려다보였다. 시야가 흐리기는 했지만, 시가지 너머론 비슬산도 보였다. 고개를 돌리면 온갖 송신탑과 안테나들이 서 있는 비로봉과 동봉도 가까이 건너다보였다. 평일이라 주능선을 타는 등산객들은 많지 않아서 이따금 한두 사람씩 지나갈 뿐이었다. 
 

서봉과 바위 틈의 구절초
멀리 금호강과 시가지와 비슬산이 보인다.
비로봉과 동봉

 
오도재를 향하여 걷다가 길가에서 산앵두를 만나 반가웠다. 블루베리와 함께 진달랫과가 아니랄까봐 열매의 생김새는 블루베리를 닮았지만 색깔은 빨갛다. 열매를 몇 개 따서 입안에 넣으니 새콤한 맛이 옛날 그대로다. 오늘은 비로봉과 동봉을 거치지 않고 일찌감치 하산하기 위해 오도재에서 오른쪽 비탈길로 접어들었다. 한참을 내려오니까 다시 단풍지대가 열리고, 조릿대 군락이 펼쳐졌다. 조릿대는 조리를 만드는 대나무라는 데서 붙은 이름이겠지만, 내게는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식물이다.
 
내가 어릴 적에는 아이스크림이란 것이 없었고 얼음처럼 단단한 '아이스께끼'가 있었다. '께끼'는 케이크가 변형된 말이다. 그 아이스께끼에 하나씩 들어가는 꼬챙이를 조릿대로 만드는데, 마을 사람들은 저 조릿대를 베어 줄기만 추려서 40리 밖의 대처로 나가 파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조릿대를 찌러 몇 번 간적이 있는데, 그곳이 이 부근이 아니었던가 싶다. 조릿대뿐만 아니라 토마토나 고추밭에 지지대로 쓸 잡목도 베어서 지게로 마을까지 운반한 다음 소달구지나 리어카에 싣고 '해안장(지금의 불로5일장)'에 나가 팔았다. 이 산촌에서 돈살 것이라곤 그런 것들밖에 없었다. 그러구러 부모님들은 자식들을 키우고 학교에 보냈던 것이다.
  

산앵두와 오도재에 서 있는 이정표
조릿대 군락

 
그렇게 단풍과 조릿대를 바라보며 내려오다 보면 물소리가 제법 크게 들리고, 동봉과 비로봉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나는 갈림길이 나온다. 이 부근을 마을 사람들은 '국드리미'라 불렀는데, 여기엔 섬뜩한 전설이 있다. 전설이라기보다는 한국전쟁 때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어르신들이 들려준 이야기다. 국군이 후퇴를 거듭하여 대구와 부산만을 남겨두고 낙동강 전선에서 양쪽이 대치하고 있던 때가 아닌가 싶다. 산속에 숨어 지내던 인민군들이 밤만 되면 마을로 내려와 식량을 약탈해 가곤 했다. 그들이 한번은 밤중에 마을의 소를 한 마리 몰고 올라가 이곳에서 잡아먹고 있었다고 한다. 물가에서 삶거나 구운 소다리를 뜯으며 모처럼 포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국군이 습격하여 수십 명의 인민군을 사살했다고 한다. 내가 어릴 때까지만 해도 바위틈에 군화가 나뒹굴었다.
 
팔공산 기슭의 골짜기들엔 재미난(?) 이름들이 붙어 있는데, 야시(여우)가 살고 있는 골짜기라서 '야시골', 호랑이가 지나간 골짜기인 '호지난골', 장군석이 서 있는 뫼(산)라는 뜻인 '장군미' 같은 이름들이다. 그런데, 이곳을 왜 '국드리미'라고 했을까? 그 시절의 어르신들이 계시지 않아 물어볼 데도 없지만, 그렇게 골짜기 이름을 붙이던 어법으로 추측은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군이 들이밀었다' 혹은 '군이 들이닥친 '라는 의미로 붙인 지명이 아닐까? 
 

국드리미 부근
누가 고사목을 깎아서 운치 있는 벤치를 만들어 두었다.
폭포와 잎이 예쁜 으름덩굴
바위와 단풍나무

 폭포와 너럭바위를 지나 한참을 내려오다 보면 길 왼쪽에 육중한 '글쓴바우'가 길쪽을 바라보며 두꺼비처럼 앉아 있다. 이 바위에 대해선 여러 말 하는 것보다 졸시 한 편을 올려두는 것이 좋겠다.
 
   글쓴바우*
   김상동
 
 
   이쪽은 폭포, 가리재, 큰골, 야시골, 호지난골
   저쪽은 보랑골, 너리청석, 오도재 너머 한밤**
   아버지와 함께 나무하러 다니던 길 옆에
   큰 바위 하나 두꺼비처럼 앉아 있지
   솔숲에 국수나무, 싸리나무, 머루덩굴에 싸여 있지 
 
   저 바우에게 고맙다고 인사해라
   저 바우에게 부탁해서 너를 낳았단다 
 
   지게 받쳐 두고 풀숲을 헤치고 다가가 보면 바위엔 한문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지 뜻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 열여덟에 시집 온 어머니 서른이 되도록 태기가 없어 이 신령스럽고 위엄 있는 바위 앞에 촛불 밝히고 빌었다네 날마다 빌고 또 빌었다네 마침내 서른하나에 소원을 이루셨네
 
   어머니 아버지, 어디 계시나요?
   홍수가 계곡을 온통 휩쓸고 지나갈 때도
   사람들이 하나 둘 도시로 떠날 때도 
   꿈쩍하지 않던 저 육중한 바위 앞에
   평생 걱정이시던 이 아들 덩그마니 맡겨 두고
   어느 먼 별에 가 계시나요?
 
   바위야, 바위야 내 소원도 한번 들어 다오
   그 옛날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 주었듯이
   다시 한 번 이 세상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나게 해 다오 
   꿈속에서만 말고 동화처럼 신화처럼
   단 하루만이라도 글쓴바우야  
 

 
   *글쓴바우 ⁚ 팔공산 수태골에 있는 큰 바위. 수릉봉산계綏陵封山界 표석. 지금은 대구광역시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한밤 ⁚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大栗里의 옛 이름.

 

조금 더 내려오다 보니 길가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낯익은 반석이 하나 놓여 있다. 지금은 등산객들이 벤치로 사용하고 있겠지만, 예전의 마을 사람들은 나뭇짐을 실은 지게를 이 반석 위에 받쳐 두고 잠시 쉬곤 하던 곳이다. 무거운 짐이 실린 지게를 땅바닥이 아닌 반석 위에 세워 지겟작대기로 받쳐 두면 무릎을 꿇어 힘들게 일어나지 않고도 서서 지게를 다시 질 수 있는 것이다. 반석 옆에는 늙어 쓰러진 나무가 이끼와 버섯들에게 몸을 내주고 있었다.
 

글쓴바우
지게를 받치던 반석

 등산로 입구까지 내려오면 왼쪽에 참나무와 소나무가 몸을 꼬며 안고 서 있는 연리지가 있다. 아마도 예전에 나무하러 지나다니던 마을 사람들이나 등산객이 길 쪽으로 쓰러진 어린 두 나무를 일으켜 세우면서 쓰러지지 말라고 대수롭지 않게 슬쩍 꼬아 둔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자주 가는 도동 측백나무숲 앞에는 회화나무와 느티나무의 연리지가 있다. 그들은 서로 팔만 걸고 서 있지만, 여기선 두 나무가 온몸으로 껴안고 있다.
 
이렇게 해서 오후 네 시경까지 15,000보를 걸으며 추억의 산길 걷기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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