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동균

1205호

공산(空山) 2018. 11. 29. 16:38

   1205

   전동균

 

 

   수리를 하긴 했지만 좀 낡았답니다

 

   이 갈색 탁자는 아버지가 만드신 것

   마른 꽃들이 꽂힌 작은 항아리는 어머니가 아끼시던 거예요

   제 것은 별로 없어요

 

   맞아요, 그림 속의 저 나귀는 잠 씨*의 농장에서 도망친 거죠

   오후 세 시만 되면 어디론가 사라지곤 해요 물통을 지고

 

   마루가 삐걱거려도 무시하세요 소심한 것들은 원래 그래요

   창문들은 늘 말이 없지요

   매를 맞고 자란 전갈좌의 남자처럼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침묵이 유일한 무기란 걸 잘 알고 있는 거죠

 

   쉿, 저 구석방의 문은 열지 마세요

   거긴 온종일 지구를 도는 열차가 달리고 있고

   수염이 허옇게 얼어붙은 채 끊임없이 주문을 외는 촛불이 살고 있어요

   가까이 다가가면 크르렁, 시뻘건 이빨을 번뜩이며 울부짖죠

   자폭하겠어!세상을 다 날려버리겠어!

 

   여긴 저녁 햇볕이 가장 환해요

   햇볕 속에 반짝이는 게 무엇인지

   자기 눈을 찌르는 칼날들인지, 아무리 강풍이 불어도 끄떡없는 까치둥지인지 모르겠어요

   언젠가는 저 속에서 알몸뚱이 천사가 떨어진 적도 있어요 가엾은 벌레 같았죠

 

   어두워져도 불이 켜지지 않는 집이에요

   재로 짠 옷을 입고 밤은 찾아오죠

   우리는 모두 깨진 그릇 같은 존재들

   누군가 간신히 본드로 붙여놓았죠

   언제 부서져 흩어질지 몰라요

 

   잠깐 앉으세요 조금만 쉬었다 가세요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제 피는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으니

   커피 맛은 괜찮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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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시스 잠Francis Jammes.

 

   —「3회 윤동주서시문학상수상작품집(2018.11)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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