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악 27

뒷길로 가자

뒷길로 가자 이용악 우러러받들 수 없는 하늘 검은 하늘이 쏟아져내린다 온몸을 굽이치는 병든 흐름도 캄캄히 저물어가는데 예서 아는 이를 만나면 숨어버리지 숨어서 휘정휘정 뒷길을 걸을라치면 지나간 모든 날이 따라오리라 썩은 나무다리 걸쳐 있는 개울까지 개울 건너 또 개울 건너 빠알간 숯불을 비웃이 타는 선술집까지 푸르른 새벽인들 내게 없었을라구 나를 에워싸고 외치며 쓰러지는 수없이 많은 나의 얼굴은 파리한 이마는 입술은 잊어버리고저 나의 해바라기는 무거운 머리를 어느 가슴에 떨어뜨리랴 이제 검은 하늘과 함께 줄기줄기 차거운 비 쏟아져내릴 것을 네거리는 싫어 네거리는 싫어 히 히 몰래 웃으며 뒷길로 가자

이용악 2016.02.04

하늘만 곱구나

하늘만 곱구나 이용악 집도 많은 집도 많은 남대문턱 움 속에서 두 손 오그려 혹혹 입김 불며 이따금씩 쳐다보는 하늘이사 아마 하늘이기 혼자만 곱구나 거북네는 만주서 왔단다 두터운 얼음장과 거센 바람속을 세월은 흘러 거북이는 만주서 나고 할배는 만주에 묻히고 세월이 무심찮아 봄을 본다고 쫓겨서 울면서 가던 길 돌아왔단다 띠팡을 떠날 때 강을 건널 때 조선으로 돌아가면 빼앗겼던 땅에서 농사지으며 가 갸 거 겨 배운다더니 조선으로 돌아와도 집도 고향도 없고 거북이는 배추꼬리를 씹으며 달디달구나 배추꼬리를 씹으며 꺼무테테한 아배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배추꼬리를 씹으며 거북이는 무엇을 생각하누 첫눈 이미 내리고 이윽고 새해가 온다는데 집도 많은 집도 많은 남대문턱 움 속에서 이따금씩 쳐다보는 하늘이사 아마 하늘이기..

이용악 2016.02.04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이용악 나는 죄인처럼 수그리고 너는 코끼리처럼 말이 없다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너의 언덕을 달리는 찻간에 조고마한 자랑도 자유도 없이 앉았다 아무것두 바라볼 수 없다만 너의 가슴은 얼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안다 다른 한 줄 너의 흐름이 쉬지 않고 바다로 가야 할 곳으로 흘러내리고 있음을 지금 차는 차대로 달리고 바람이 이리처럼 날뛰는 강 건너 벌판엔 나의 젊은 넋이 무엇인가 기다리는 듯 얼어붙은 듯 섰으니 욕된 운명은 밤 우에 밤을 마련할 뿐 잠들지 말라 우리의 강아 오늘 밤도 너의 가슴을 밟는 뭇 슬픔이 목마르고 얼음길은 거칠다 길은 멀다 길이 마음의 눈을 덮어줄 검은 날개는 없느냐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북간도로 간다는 강원도치와 마주앉은 나는 울 줄을 몰라 외롭다

이용악 2016.02.04

벨로우니카에게

벨로우니카에게 이용악 고향선 월계랑 붉게두 피나보다 내사 아무렇게 불러도 즐거운 이름 어디서 멎는 것일까 달리는 뿔사슴과 말발굽 소리와 밤중에 부불을 치어든 새의 무리와 슬라브의 딸아 벨로우니카 우리 잠깐 자랑과 부끄러움을 잊어버리고 달빛 따라 가벼운 구름처럼 일곱 개의 바다를 건너가리 고향선 월계랑 붉게두 피나보다 내사 아무렇게 불러두 즐거운 이름

이용악 2016.02.04

나를 만나거든

나를 만나거든 이용악 땀 마른 얼굴에 소금이 싸락싸락 돋힌 나를 공사장 가까운 숲속에서 만나거든 내 손을 쥐지 말라 만약 내 손을 쥐더라도 옛처럼 네 손처럼 부드럽지 못한 이유를 그 이유를 묻지 말아다오 주름 잡힌 이마에 석고처럼 창백한 불만이 그윽한 나를 거리의 뒷골목에서 만나거든 먹었느냐고 묻지 말라 굶었느냐곤 더욱 묻지 말고 꿈 같은 이야기는 이야기의 한마디도 나의 침묵에 침입하지 말아다오 폐인인 양 시들어져 턱을 고이고 앉은 나를 어둑한 폐가(廢家)의 회랑에서 만나거든 울지 말라 웃지도 말라 너는 평범한 표정을 힘써 지켜야겠고 내가 자살하지 않는 이유를 그 이유를 묻지 말아다오

이용악 2016.02.04

암울한 시대의 방랑자 이용악의 시 - 감태준

암울한 시대의 방랑자 - 이용악의 시 감태준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경계 이용악이 살았던 경성읍은 "우라지오 바다"며 "아라사 벌판"으로 진출하는 관문 노릇을 하는 국경도시였다. 이용악의 조부는 여기서 일찍부터 몸소 소달구지에 소금을 싣고 아라사(阿羅斯, 러시아)를 넘나들었다. 이 일은 그의 부친 대(代)에도 계승되었으며 이 일로 하여 이용악은 어릴 무렵 부친을 잃고 말았다. 실제 이용악의 어릴 때 집은 남문 밖 시장 거리에 근접해 있어서 이 같은 사실을 밑받침해 주고 있는데 이를 종합해 볼 때 그의 계층적 성분이 기층인 소상공인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 밝혀진다. 이용악의 이 같은 계층적 특성은, 인구 2만 5천의 국경도시 경성과 일본 유학 등 모더니즘 문학 세대의 도시 체험을 갖추었으면서도 끝내 도시문학으..

이용악 2015.12.10